(인터뷰) ‘우아한 가’ 배종옥 “한제국으로 여배우 유리천장 깨고 싶었다”
"호평 받을 거란 기대도 못해…그만큼 카타르시스 느껴"
"한제국, 전무후무한 캐릭터…여배우로서 새로운 장르를 썼다"
입력 : 2019-10-18 08:14:37 수정 : 2019-10-18 08:14:37
[뉴스토마토 김희경 기자] “한제국은 저에게 있어서 정말 욕심이 나는 캐릭터였어요. MBN이라는 방송국의 드라마를 선택하게 된 계기도 전부 한제국이 계기였죠. 이런 캐릭터는 전부 남자의 영역이었는데, 여자인 제가 연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제국을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배종옥)
 
배종옥은 ‘걸크러시’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부터 자기주도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한제국 앓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드라마 촬영이 전부 끝난 인터뷰 현장에서도 “오늘 메이크업 할 때 ‘한제국처럼 아이라인을 그려줘’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꺼내 웃음을 자아냈다. 배종옥에게 한제국은 단순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캐릭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배종옥은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MBN-드라맥스 수목드라마 ‘우아한 가’ 종영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배종옥은 호탕하고 유쾌했다. “오늘 한제국처럼 메이크업을 하고 왔는데 어떠냐”고 묻는 그의 모습은, ‘우아한 가’ 애청자만큼 그가 한제국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셈이었다.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사실 그는 ‘우아한 가’의 시놉시스를 처음 받아봤을 당시만 하더라도 한제국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초반에는 매니저에게 “나 이거 못할 거 같다”며 제작진들에게 거절의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종옥이 한제국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한제국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성 때문이었다.
 
“사실 MBN 드라마가 그전까지는 그렇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저에겐 부담감이 있었고, 제 역량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시놉시스를 본 다음부터 자꾸 이 캐릭터가 눈 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심지어 남자가 맡을 역할이 저에게 온 것까지도 너무 욕심이 들었습니다. 대본이 쉬지 않고 넘어갔고 보면 볼수록 정말 드라마가 재밌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서더군요. 그래서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그렇게 ‘우아한 가’라는 배에 탑승하게 된 배종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종옥은 드라마 흥행에 대해서는 큰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전작의 저조한 시청률은 물론이며, ‘재벌가’라는 이야기 주제는 사실 이미 많은 드라마에서 사용된 단골 소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배종옥은 촬영 초반 감독에게 “이 소재 너무 뻔한 거 아니냐”라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고 확실하게 답하는 감독의 말과, 어마어마한 세트장의 규모를 보고 납득하게 됐다고 전했다.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저는 감독님이 TOP 세트장을 그렇게 볼륨감 있게 만들 거란 생각을 못 했어요. 물론 재벌가를 컨트롤해야 되기에 막강하고 휘황찬란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세트장을 실제로 보니 정말 압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달 동안 세트장을 수정하길래 ‘대체 얼마나 하려고 그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보자 마자 느낌이 오더라고요. TOP의 세트장은 단순히 볼 거리를 넘어서서 우리 세상에 보이지 않는 힘을 움직이는 권력을 빗대어 표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한제국이라는 캐릭터는 배종옥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름과 톤이 달라질 뻔했다. 남성과 여성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배종옥은 작가에게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의 한제국이 아니면 그만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았다고.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한제국의 원래 대사톤은 ‘~하시겠습니까’ 혹은 ‘~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여자 톤으로 바꾸면 ‘~하시겠어요?’, ‘~예요’가 됩니다. 그렇게 하니 한제국의 원래 성격이 죽는 거 같더라고요. TOP의 수장이 아니라 무슨 비서 같은 존재처럼 비쳐지더군요. 이름도 만약에 ‘한제숙’이었다면 더 멋이 없었겠죠. 정말 지금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 겁니다. 한제국의 원래 모습이 훨씬 멋있어요. 남자 이름을 가진 여자가 어때서요?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그런 이름 많잖아요. 저희 작가님도 여성이지만 이름은 ‘권민수’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배종옥은 그간 연기에 대한 갈증이 상당히 컸다. 주연보다는 주연의 가족, 혹은 뻔한 캐릭터로 소비되는 모습에 스스로 ‘나는 이대로 끝나나?’, ‘나는 죽을 때까지 이런 역만 해야 되나?’라는 고민에 빠졌다고. 그럴 때마다 배종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확고했다. 단순히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연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배종옥은 스크린, 브라운관, 극장을 화려하게 오가며 다채로운 연기를 소화했다. 자신이 도전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소비되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한제국이라는 캐릭터 또한 그런 도전 정신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한제국이라는 캐릭터는 여성으로서 연기하기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런 캐릭터가 전무후무합니다.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역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전부 남자의 영역에 속했기 때문이죠. 특히 정치나 권력 싸움에 있어서는 남성 연기자들의 파트에 속해 있었는데, 여자인 제가 도전을 하는 건 정말 의미가 깊습니다. ‘여배우로서 새로운 장르를 썼다’는 평가를 받아서 배우인 저에겐 너무나 기분이 좋은 일입니다.”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실제로 배종옥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많은 여배우들이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고 털어놨다. 같은 업계에 일하는 여성 배우와의 대화 주제도 대부분 ‘우리는 왜 이렇게 할 역이 없을까’, ‘우리는 왜 이럴까’가 많았다고. 배종옥은 “다른 여배우들에게도 한제국은 매우 의미 있는 행보가 아닐까 싶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제국이라는 캐릭터는 한국 드라마계에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아한 가’를 시작으로 누군가는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까요? 한제국이라는 캐릭터에 단순히 멈추지 않고 더욱 발전된 캐릭터가 생겨나고, 그렇게 되면 여성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제국은 그저 시작에 불과해요.”
 
배종옥은 한제국을 연기하는 동안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주인공인 대법원 판사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를 많이 참고했다고 털어놨다.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넘치고, 남성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당당한 모습은 분명 공통점이다. 하지만 한제국은 긴스버그와 달리 ‘유리천장’ 앞에서 좌절의 시기를 지닌 인물이다. 배종옥은 “한제국이라는 캐릭터가 생겨난 이유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사실 한제국이라는 인물을 처음 맡았을 때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한제국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 지 알고 싶었거든요. 한제국은 과거 판사로 머물 때 남성 선배들의 부정한 행위를 보고 ‘이건 옳지 않습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정의감이 넘쳐나던 시기였죠.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지방 좌천이라는 굴욕이었습니다. 유리천장을 깰 수 없었던 거죠. 이때 MC그룹 회장에게 오너리스크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그 순간 한제국은 비뚤어진 욕망을 품게 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명예롭고 정의롭다고 생각해? 아니잖아. 너희들도 돈 필요해서 움직이는 거 잖아. 나는 적어도 돈을 갖기 위해 명예와 정의라는 가면은 너희들처럼 쓰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을 갖게 되죠. 그렇게 한제국은 철저하게 자본의 뒤에 가려지지만 MC그룹의 힘으로 얻은 정보들로 그들을 오히려 쥐락펴락하게 되는 거죠. 저는 MC그룹 측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한제국이 결코 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제국은 그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한 인물이죠. 어떻게 보면 외부에 노출되는 사람들보다 훨씬 당당하고 떳떳합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기 때문이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어차피 세상은 이렇게 움직일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 하나가 이렇게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생각하죠.”
 
배종옥은 그야말로 ‘소처럼 일하는 배우’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KBS 한국방송공사 특채 연기자로 데뷔한 뒤 지금까지 쉴 틈 없는 연기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배종옥은 “일할 때 내가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고 웃었다. 오히려 연기를 하지 않으면 힘이 든다는 것. 연기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베테랑이면서도 그는 “매 순간 연기를 할 때마다 새롭다”고 말했다.
 
“30년 넘게 연기를 하다 보면 무슨 연기를 해도 평타라는 소리를 받습니다. ‘배종옥이니까’라는 말이 대표적이죠. 또 시간이 갈수록 저라는 배우보다는 저와 함께 출연하는 새로운 스타들에게 집중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제국이 이렇게 사랑받았다는 건 경이로운 일입니다. 함께 연기했던 젊은 배우들과 견주었을 때도 지지 않는 영향력을 가진 캐릭터를 가지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또 제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역대급 캐릭터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건 정말 어렵죠. 그런 의미에서 한제국은 저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캐릭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항상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종옥. 언뜻 봤을 때는 그에게 시련이란 그저 바람에 조금 흔들리는 고목의 나뭇가지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배종옥 또한 배우로서 일을 하는 동안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배우를 하면 절정에서 하락하는 혼란의 시기가 온다. 나 또한 그때 조울증을 겪었다”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배종옥은 어떻게 그 고통을 털어낼 수 있었을까.
 
“저는 40대 초반에 법률스님과 함께 마음 공부를 했습니다. 수련이 저에게 많은 힘을 줬죠. 그걸 하지 않았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행복을 몰랐을 거예요.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면서 제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겠죠. 이제는 어떤 문제점이 찾아와도 그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냉정하게 평가하게 됐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도 그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연예계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외부의 평가로 나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남들은 나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걸 안 후로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걸 두려워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오로지 내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논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논란을 통해 내가 극복하고 변화하는 게 의미가 있는 거죠. 그게 아니라면 삶이 무슨 재미가 있나요.”
 
배종옥은 앞으로도 여성 배우로서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해 주저없이 도전할 예정이다. 한제국을 연기하며 머리에 흰머리를 넣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성 배우라는 이유로 너무 젊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연륜의 깊이나 정서의 표현을 보여주는 게 더 좋은 배우의 모습 같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한제국과 이별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제국아, 넌 정말 멋진 여자야. 어떻게 보면 나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겠죠. 또 이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요. 한제국이 멋지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걸 보고 자라는 어리고 젊은 여성들이 훨씬 더 멋지고 당당하게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멋진 여성이고, 이렇게 행동할 거고,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 구태여 말을 하지 않는 사회. 그걸 알려주고 싶어요. 그런 여성들이 더 많이 우리 사회에 보여졌으면 좋겠습니다.”
 
배종옥. 사진/제이와이드컴퍼니
 
김희경 기자 gmlrud1515@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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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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