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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고르

세상을 구하는 인문학

2019-08-0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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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호의 뉴스카페를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17번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를 마지막으로 인사드립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하고 꿈을 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
 
과거 땅에서 뼈가 나오면 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드래곤의 정체를 믿었다. 중첩된 사고를 한 것이다. 현실과 가상의 조합. 요즘은 믿나? 신학을 믿을까? 아니다. 현대 시대 특성은 합리화, 지성화, 탈주술화다.
 
산에 신령은 없다. 나무는 그냥 나무일 뿐이다. 탈마술화. 미신에서 탈피한 인종이 호모 사피엔스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춤추며 일하고 노래부르는 '노는 존재'. '호모 루덴스'. 유희인은 문명화 과정을 거쳐 자유인, 경제인, 직업인으로 진화된다. 근대의 시작이다. 
 
데카르트는 3가지를 지켜야 야만인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감각을 믿지 말라"
 
물속의 젖가락은 휜 것이 아니다. 휘어 보이는 것이다. 
 
"상상력을 버려라"
 
중세는 미신을 믿는 사회다. 상상력은 없는 것을 만들어 사람의 판단력을 현혹시킨다. 
 
"감정을 억제하라"
 
욱하지 말라는 뜻이다. 감정을 이성보다 못한 것으로 봤다. 
 
돈키호테는 전사적이다. 전형적인 중세사람이다. 근대는 햄릿이다. 근대 들어서 사람들은 숙고를 한다. 그래서 내성적으로 변한다. 중세때 도망가면 비겁자가 된다. 사회에서 매장된다. 머리는 비고 몸만 튼튼하다. 인성의 안정성이 없다. 전쟁에서 싸우고 교회에서 회개하는 삶이다. 
 
"존재 자체가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 근대 시대 국가가 생기면서 궁정의 권력투쟁이 생긴다. 이는 근대화를 더 부추긴다. 궁정투쟁은 무기를 안쓴다. 음모, 계략이 판친다. 중세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저돌적이다. 궁정에서는 머리를 굴려 감추고 상대를 읽는다.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는다. 몇단계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존한다. 
 
근대의 궁정화를 통해 내성적 인간으로 바뀐다. 소설을 보라. 고대는 행동만 묘사한다. 근대부터 심리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중세는 외형적이며 감정적. 근대 들어 사람의 감정을 억제하게 됐다. 
 
앨버트 허쉬먼이라는 학자.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 시키는 동물이다"
 
이성은 변명의 도구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힘이 더 쎄다.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게 가능할까? 경험론자들은 말한다. 
 
"감정은 감정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이성을 못믿겠다" 
 
A를 B로 통제하는 것. 즉 마시멜로 이야기와 같다. 느긋한 화로불로 큰불을 누르는 법. 이것은 바로 근대 들어 '이해관계' 때문에 가능해진다. Interest. 돈. 이 돈이 감정을 통제하게 된다. 고로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진화한다. 
 
일본을 보라. 실수를 하면 연일 '스미마셍'을 외친다. 우리를 보라. 우리는 성질이 불같다. 어쩌면 아직 중세적 인간형인지도 모른다. 손님이라면 어디로 갈까? 일본가게? 한국가게? 쪽팔리는건 순간이지만 이익은 영원하다. 일본은 그래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다. 
 
오지로 일 할 사람을 모집한다. 보통 안간다. 임금의 3배를 준다면? 너도나도 지원한다. 돈은 이렇게 쾌락을 통제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억제한다. 놀지말고 공부하라는 말. 그것도 결국 돈이 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연봉이 86억이어도 삶을 스스로 끊는 사람들이 있다. 호모 경제인의 모순이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한다. 그리고 점차 직업인으로 바뀐다. 돈의 존재가 그렇다. 중세에서 카톨릭은 가난했다. 개신교는 잘산다. 프로테스탄트라 그렇다. 금욕적인 모델. 카톨릭에서 금욕하는 성직자들이 모델이었다.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살았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렇게 말한다. 
 
"수도원 갈 필요 없다. 삶이란 하느님이 주신 것. 직업도 하나님이 부여해준 것"
 
직업소명설이다. 직업이란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것이다. 사업이 잘돼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는 돈을 다시 투자한다. 놀지 못한다. 직업은 하나님이 맡긴 일이기 때문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렇게 진화한다. 이는 직업인으로써 굳어진다. 
 
"아빠 내일 또 와요"
 
 
광고의 한 구절이다. 아빠는 아이랑 못논다. 회사에 속한 사람이니까. 사유인이 된 것이다. 근대로 인해 상상력도 없어진다. 오직 이성적으로만 행동한다. 하지만 이성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감정의 힘이 더 쎄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경제인에서 직업인으로 변모한다. 
 
놀지 못하는 인간. 공장에서 일만한다. 놀 수 있는 매직서클이 없어진다. 놀이가 주변화된다. 그래서 매일 밤 노래방에서만 논다. 그건 노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애들만 논다. 허나 애들도 못놀게 해서 PC방만 전전한다. 호모 루덴스는 이렇게 퇴화했다. 그리고 디지털과 함께 지금 다시 부활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 그것은 '불변'에 대한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영원과 불변. 영원은 시간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불변은 시간을 초월해 이어지는 것이다. 만물은 영원하지만 불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타나고를 반복한다. 사람은 불변에 집착하면서 보이지 않는 '가상'에 집착을 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리하여 종교와 영혼이라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낸다.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인간상. 과거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존경받았다. 이는 공부 잘하는 인간이다. 앞으로는 호모 루덴스가 각광받는다. 잘 노는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지식을 얻는 것보다 지식을 이용해 놀이로 즐기는 것. 미래 사회다. 
 
스티브 잡스는 모교 졸업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학교를 때려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금 사회는 호모 루덴스가 주도한다.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다. 놀이는 무엇일까? 과거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 루덴스였다. 모든 것은 놀이였다. 일도 공부도 삶도 놀이 안에서 이뤄졌다. 지금의 VR이나 AR. 과거라고 다르지 않다. 포켓몬. 현대시대에는 이런 헛개비를 규제하는 법이 생긴다. 지금은 가상현실도 리얼리티의 한 세계가 된다. 이른바 믹스 리얼리티. 비트코인도 가상이다. 페이크 뉴스. 뉴스인데 뉴스가 아니다. 음모론. 사실과 스토리가 합쳐지면 사람들은 열광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리얼리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대중의 '허영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심지어 그런 집단에 멀쩡한 사람도 많다. 
 
현실에 가상을 어떻게 중첩시키는지가 중요하다. 요즘 사회는 그런 사람들이 리더다. 잘 노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 따지고 보면 과거나 현재나 같다. 요즘은 왜 놀지 못하게 할까? 노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현대 시대에는 게임도 못하게 한다. 애들이 안놀면 머할까? 공부하라고 한다. 통제를 위해서다. 놀이도 공부가 돼야 한다. 공부는 놀이로 인식돼야 한다. 그래야 더 재밌다. 그러면에서 우리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
 
과거를 보자. 모든 것이 놀이였다. 농촌. 절기마다 놀이가 있었다. 결혼식도 놀이였다. 요즘은 부조만 한다. 문화속의 놀이 요소는 일부를 뜻한다. 문화의 놀이요소는 자체가 놀이다. 그래서 문화의 놀이요소라고 해야 한다. 옛날엔 모든 것이 놀이였다. 지금도 그래야 한다.
 
학문은 어떤가? 놀이였다. 과학도 수수께끼에서 시작했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노동도 놀이였다. 노동요. 전쟁도 옛날엔 놀이였다. 한줄로 서서 총을 쏘는 남북전쟁. 은폐와 엄폐는 게임의 룰에서 벗어난 것으로 인식됐다 .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부상자가 생기면 축구경기에서 공을 밖으로 차준다.
 
전쟁을 보자. 선전포고를 한다. 그것은 게임의 원칙이다.
진주만 습격. 북한의 남침은 반칙이다. 놀이에서 시작된 전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스포츠는 놀이가 없어졌다. 타율, 승률. 수치화된 비즈니스가 됐다. 그래서 LPGA에서 상을 싹쓸이 한다. 상금과 영광이 주가 된다. 골프는 얘기도 하면서 놀려고 즐기는 운동이다. 유독 한국 선수들만 우승에 집착하는 것은 놀이로써의 스포츠를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평생 먹고살 것을 준비해두기 위해 스포츠를 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문제는 인도에서 시작됐다. 연예편지처럼 써진 글. 알고보면 4차 방정식에 대한 글이었다. 이렇게 놀이는 현실과 가상을 섞는다.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다. 호모 루덴스는 디지털과 더불어 돌아왔다. 게임의 규칙이 적용되는 곳인 매직서클. 매직서클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게임의 룰이 적용되지 않는 곳에서 이상한 짓을 하면 망신이다. 현실과 가상이 섞여도 게임의 룰안에서 이뤄진다. 
 
삶은 놀이였다. 중세의 가상현실을 보자. 신학적 환상이 중첩된다. 기사들의 무용담. 현대시대 군대에서 무용담과 다르지 않다. 과거 유니콘, 요정을 믿는 것. 환타지와 중첩된 중세시대.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기술만 VR, AR로 바뀌었지 실제와 가상이 섞이는 것은 같다. 그림을 보자. 꼬마와 수도승 눈에만 보이는 신학적 증강현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 엘 그레코 1586년>
 
독실한 신자로 죽어서 성 스테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나타나 손수 매장을 해준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이다. 돈키호테. 현실과 환상을 혼동한다. 풍차를 적으로 간주한다. 하숙집 여주인 딸에게 기사작위를 받는다. 양떼는 군대고 풍차는 적이다. 돈키호테 소설의 의미는 무얼까? 세르반테스 시대 돈키호테는 일반 평민들의 인성이 그랬다고 말한다. 이성의 시대 데카르트 전이었다. 사람이 현실과 가상이 섞인 시대에서 이성을 찾은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사실 지금도 나무에 대고 절을 하는 사람이 많다. 하느님의 계시라며 옹알대는 사람도 흔하다. 데카르트 이후 사람은 이성을 믿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사회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은 항상 '종교의 얼굴'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방법은 많다. 우리시대라고 돈키호테같은 사람이 없을까? 수두룩하다. 자신이 정치개혁의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그많은 쓰레기와 오물을 흘리면서도 오직 한길로 질주하는 사람들. 정치나 경제나 종교나 그런 사람은 흔하다. 데카르트 전이나 후나 별반 차이가 없다. 
 
중세시대상을 보자. 정략결혼시대다. 그래서 사랑은 정작 다른 사람과 한다. 당시는 '저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을 로망이라고 했다. 순결함을 강조했다. 물론 대부분은 그 순결을 못지켰다. 로맨스라고 착각할 뿐. 현실과 중첩되는 이런 가상의 스토리. 이 가상현실은 과거나 현재, 미래에 여전히 우리 삶에 가까이 있다.  
 
우리는 눈으로 현실을 정확히 본다. 하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는 '가상'에 집착한다. 그리고 둘을 합치고 스토리를 버무린다.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놀이가 됐고 노동으로 진화됐으며 삶에 정착했다. 고로 호모 사피엔스 이전과 이후는 '호모 루덴스'의 시대다. 
 
 
삶과 죽음의 욕망

세상은 주류와 비주류로 나뉜다. 철학도 둘로 갈린다. 주류는 이성과 합리를 중시한다. 비주류는 감성과 무의식을 강조한다.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등 근대 철학은 의식 중심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로 세상을 인식하고 참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근대철학은 금이 간다. 의식보다 무의식의 존재를 밝히기 시작했다.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이성에 대한 불신을 자초한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 중 어떤 것에 움직이는가.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 죽음에 대한 욕구인 타나토스. 인간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욕망에 춤춘다. 프로이트는 의식보다 무의식에 사람이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본다. 이는 욕망이 조종한다. 가학적인 욕망. 피학적인 욕구. 욕망은 분출되고 사회는 이를 억누른다. 억눌린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쌓인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모두 수면 아래 있는 무의식의 조각들이다. 
 
프로이트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이성을 중시했다. 프로이트는 이성에서 탈주체를 종용한다. 라깡도 소쉬르적 언어구조를 통해 탈주체를 선언한다. 의식안에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우리의 주체'는 무의식 안에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이르러 무의식은 과학의 대상이 됐다.
의식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근대사상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때문에 뿌리째 흔들린다
 
히스테리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성으로 통제가 안된다. 그것은 性적인 갈등에서 나온다. 프로이트는 이를 알기 위해 최면술에서 자유연상법으로 전환한다. 의식적인 말 속에서 무의식적인 단서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무의식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프로이트는 쇼팬하우어, 니체의 욕망론을 주목한다. 비주류 철학자들로부터 단서를 얻는다. 특히 프로이트는 性적인 집착과 에너지를 강조한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에너지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性에 대한 집착으로 많은 제자들이 떠난다. 특히 칼 융은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정신분석학을 개척한다. 
 
프로이트는 왜 무의식을 연구했을까? 의식의 불안정성을 알기 위해 무의식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이란. 스파노자의 말처럼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性 욕구가 쌓인 '원초적 자아'일 수도 있다. 원초적 자아인 ID와 이를 통제하려는 초자아 Superego. 자아인 ego는 ID와 Superego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진짜 얼굴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 중 논란이 되는 것은 오이디푸스 신화다.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거치는 것이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현대예술의 해석에 대하여
 
예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2차대전 이후로 기술과 예술의 문제는 심각해졌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에 대해 기술 그리고 예술은 많은 의문을 던졌다. 
 
현대기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핵물질로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구는 쑥대밭이 됐다. 이런 현대시대를 말하는 예술은 그럼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모두 2차 대전 이후로 인간의 존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플라톤 이래 새로운 철학의 지평은 하이데거가 열었다. 이것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며 무엇을 극복하기 위한 것인가?
 
이성과 합리를 믿었던 인간은 실망한다. 그 결과 전쟁만 터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성을 강요하는 인간은 전쟁을 일삼는다. 미학강의를 했던 헤겔은 정반합으로 역사의 추동성을 얘기한다. 이런 이유로 하이데거는 헤겔을 겨냥한다.
 
하아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이성과 합리에 의존한 인간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2차대전이 우리에게 남긴 게 무엇인가? 과연 독일의 문제는 해결을 했나?"
 
현대과학기술에 의존한 인간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나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스스로 국가사회주의자임을 천명한 하이데거는 결국 이를 포기한다. 하이데거는 
 
"히틀러는 형이상학의 찌꺼기"라고 말한뒤 서양문화의 근원으로 가려고 했다. 
 
그리스철학에서 말하지 않은 것을 탐구한다. 존재와 시간. 존재의 근거. 예술의 근거. 존재와 사유는 예술에서 기술로 발전하는 존재의 역사. 인간은 생각을 하고 사고를 하며 사유에 다다른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사유는 곧 숙고이다. 존재에 대한 숙고가 없다면 기술과 예술은 무의미하다"
 
존재에 대한 숙고는 예술작품의 근원이다. 하이데거는 새로운 철학을 모색했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하여.

"진리는 자기자신을 작품에 정리하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있기는 한 것인가? 진리는 자기자신을 작품에 정립하는 것. 예술가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의견이다. 즉 진리=존재. 존재가 자기자신을 정립하는 과정이 바로 예술이다. 그럼 존재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면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휠더린에 대한 연구로 남긴다. 진리가 자기를 정립하는 사건. 휠더린의 송가를 해석해서 헌납하는 책 3권 중 '게르마니아와 라인강'이 대표적이다. 휠더린과 예술. 현대과학의 본질. 핵물리학을 가능하게 한 현재의 존재. 1938년에 지은 '세계상의 시대'다.

"인간은 계산이 가능하다고 봤는데 알고 보니 그 어떤 것도 계산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러다 보니 계속 계산을 하게 되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빠진다. 보다 더 정밀하게 계산을 하려 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달성하려는 것. 그것을 부추기는 존재. 바로 Gestell이다. 인간을 몰아세우는 것. 결국 전쟁으로 번졌다. 시대는 모더니즘을 벗어난다. 더이상 이성을 못믿겠다는 것이다. 예술은 감성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모던한 아방가르드 시대 이후 다양한 예술작품이 등장한다. 부정적이고 어려워진다. 대중문화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새로운 삶의 지평이 되는가? 기술주의로 몰아세우는 인간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파울 클레를 보면서 예술의 변화가 생긴다고 말한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것. 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다른 모습. 휠더린, 릴케의 등장, 세잔, 칸딘스키. 예술이 기술시대의 대안이 되는가?
 
현대 예술작품의 근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하이데거의 의미를 살펴보자. 흔히 모더니즘 이후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말한다. 예술도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파편화 과정을 거친다. 그림에서 철학적 토대를 쌓는다. 현대예술의 토대다. 하지만 작품만 있고 해설은 없다. 현대회화의 바탕에는 철학적 강령이 깔려 있다. 미학적 , 철학적 강령.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외국의 유파가 바로 들어왔을때 자국의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복제, 미디어, 대량 소비사회. 극사실주의를 예로 들자. 한국에서는 물상에 대한 탐구로 변한다. 사물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모사로 인식한다. 모사가 사물성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변질된다. 타국에서 출발한 예술. 그 사람들의 논리는 안보인다. 그래서 우리사회에서는 다르게 느껴진다. 들여올때 우리식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창조가 될 수는 있다. 간혹 텍스트가 잘못 해석될 때 더 창조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맥락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설픈 베끼기가 아닌 재창조가 되야 한다. 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을 살펴봐야 한다/ 과거 예술은 철학자가 판단했다. 현대는 예술가들의 철학이다. 뒤샹을 예로 들어보자. 작품이 별로 없다. 이것저것 장난한 것들 뿐이다. 
 
자신이 정당한 작품임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관념. 바로 현대예술의 경향이다. 과거는 장인. 현대는 예술자체가 물성이 없어진다. 재료성도 없고 정신성이 더 강해진다. 작품보다 발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자기가 직접 만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철학이 과거와 현대가 달라서 그렇다. 현대예술은 철학없이 이해하기 힘들다. 과거는 설명하기 위한 철학. 현대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의 철학이다.
 
 
그런데 현대작품은 해석이 부족한 편이다. 현대예술을 해석하는 철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헌대예술에 대한 100년 회고작업이 최근에 이뤄지기 시작했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현상, 시각적인 특징만 비교하는게 아니라 원리가 무엇인지 연구한다. 그 작품의 원리가 무엇인지 그 언어로 무엇을 하려고 한건지.
 
예술작품에 깔려있는 철학배경 찾아내기가 중요하다. 예술은 이렇게 2차대전을 거쳐 존재의 의미를 다르게 보여주고 있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이성과 감성의 중간지점에서.
 
 
 
제국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폴란드에 바웬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으로 인해 폴란드는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소련은 급격히 무너진다. 베를린 장벽이 사라진다. 소련이라는 제국은 바웬사라는 사람으로부터 붕괴됐다. 
 
바웬사 옆에는 교황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보통 레이건의 음모로 소련이 붕괴됐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인 과정일 뿐이다. 제국의 붕괴가 음모로 이뤄지지 않는다. 소련이라는 제국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그리고 미국은? 또 중국이라는 제국을 꿈구는 나라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동구권의 몰락은 제국의 붕괴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20세기 형태의 제국 아래서 살기를 거부한다. 이 형태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미국이 그렇다. 미국처럼 되려고 하는 중국이 그렇다. 그 사이에 낀 한국입장에서 중요한 문제다. 
 
Man of Hope 바웬사가 노동자에서 대통령까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레이건, 교황, 고르바초프. 국제적인 연대에 의해서 발렌사가 만들어졌다고 영화는 그린다. 이로 인해 동구권 몰락하고 소비에트가 해체된다. 바웬사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해 소련을 붕괴시킨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다.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볼 일은 아니다. CIA의 공작으로 소련이라는 제국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역사적인 수순이다. 바웬사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그리고 몇달후 바웬사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한다.
 
폴란드 노동자들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런 인물을 CIA가 우발적으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폴란드의 변화가 냉전을 종식시켰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결국 동구권이 소련에서 떨어져 나간다. 소련은 이로 인해 붕괴된다. 
 
레이건, 대처 등 극우분자들이 연합해서 세계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소련 스스로 모순이 발생해 무너졌다. 폴란드를 들여다 보면 너무 열악한 생활이었다. 과거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 폴란드를 전부 접수할 정도로 가난해졋다. 그만큼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았다.

소련의 지배는 무력이다. 그리고 폴란드는 선택하지 않은 사회 체제를 거부했다.
다른 제국인 미국을 보자. 사실 소련이나 미국이나 같은 제국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지가 온화하고 braindrain에 투자한다.
미국식 교육과 헤게모니를 심어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것이다. 
 
소련의 구라파는 흉악했다. 차르에서 벗어나 공산주의를 만들었지만 다시 차르를 강요하고 있었다. 동구권은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관료들의 부패는 극심했다. 
 
이는 20세기에 구축된 제국주의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지 미국의 지배는 온화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제국이 아닌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반면 소련의 지배는 거칠다.
 
소련의 붕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가 더이상 제국주의적인 압박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은 과격한 사회변화를 뜻한다. 대중의 삶이 망가져야 가능하다. 배가 고프거나 고통이 심해야 사회변화를 갈망한다. 그런 이유에서 폴란드의 바웬사가 적절했다. 
 
한국은 왜 사회변화가 안될까? 70년대까지 그런 징후가 있었다. 지금은 미국이라는 제국 아래서 어느 정도 잘살기 때문이다. 사회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불만이 축적되지 않는 나름 합리적인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지식인만 사회변화를 소리치는 이유다. 개인의 탁월성으로는 혁명이 되지 않는다. 때와 더불어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게 사회변화의 리더십이다. 소련자체의 문제점. 그리고 지배방식이 미국에 비해서 외면적으로 깨지기 쉬운 구조였다. 그 또한 미국도 붕괴되어 가는 중을 보여주고 있다. 
소련이 있음으로써 존재했던 미국의 건강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소련의 붕괴는 바람직했다.
 
그럼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긴다.
 
중국. 중국은 과연 지금의 미국 수준까지 갈 수 있을까?
미국은 어느 제국보다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미국 다음을 잇는 제국이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 보인다. 한국도 G2라는 두 제국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살아남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
 
 
펌웨어에 대하여
 
컴퓨터는 펌웨어를 가지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펌웨어는 본유관념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가지는 생각능력이다. 컴퓨터는 부팅을 하면 펌웨어를 읽고 작동한다. 사람도 태어나면서 본유관념을 이용해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경험이 더해져 학습을 한다.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본유관념인가 경험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경험론자 로크. 합리론(본유관념)자 데카르트. 이들의 생각은 칸트에서 종합된다. 선험적 종합론. 칸트는 '사람은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고 사고하는가'에 대한 책을 3권 썼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다. 이것은 모두 '자아'에 관한 이야기다. 
 
칸트 이후 피히테는 이를 부정한다. 칸트는 자아와 자아 밖의 비아를 생각했다. 피히테는 비아(사물)은 자아안에 포함된 절대자아라고 생각한다.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미 비아가 자아안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자체'라고 하는 것을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자아가 비아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절대자아에 포함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문제는 왜 중요할까? 인간이 어떻게 자신과 자신밖의 것을 인식하는 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그것을 왜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지. 또 왜 진리값을 다르게 보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결국 진리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우리는 자아가 사물을 인식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진리값이 무엇인지는 전혀 감을 못잡고 있다. 이런 의문은 진리값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탐험이다. 그것은 자아와 세상을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합리론자다. 자아는 이미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대체 자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한다. 사유를 통해서만 오직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쨌든 경험과 본유관념에 대한 정리는 칸트가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자아가 사물자체를 인식하는지는 명쾌하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피히테가 "비아는 자아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가분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자아든 비아든 분리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헤겔 이전에 정반합을 먼저 꺼내들었다. 이를 헤겔이 뒤잇는다. 피히테의 주장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칸트와 헤겔의 교두보 역할에서 정반합 이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높다. 
  
이미 우리는 비아를 안다
 
하지만 만약 모르는 것을 만나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경우에는 배제하게 된다. 극도로 자유적이고 이기적인 자아가 형성된다. 피히테의 절대자아론이 부서진다. 그리고 절대자아끼리 만나면? 피히테는 주장한다.
   
그래서 국가가 중요하며 이를 조율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개체 소멸도 필요하다. 
 
즉 자아를 절대자아로 만듦으로써 신의 자리에 인간을 두었다. 하지만 절대자아는 이론이 부실하다. 만약 똥을 봤을때 똥이냐 쨈이냐를 자아는 각각 다르게 판단한다. 부자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진리의 상대성을 무시할 수 없다. 절대자아끼리 부딪혀서 분쟁이 생길때 국가통제가 필요하다는 이론이 나온다. 이는 히틀러를 의미한다. 진리를 찾기 위해 절대자아를 설정했다가 극도로 독단적인 절대자아가 탄생하게 된다. 국가통제를 합리화 한다. 
 
거대한 독단이론으로 변질된다. 이는 사람간의 차이를 부정하게 된다. 피히테의 완결체적 자아는 히틀러다. 정작 헤겔보다 먼저 정반합을 얘기했지만 역사적 변화라는 큰 틀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반합의 교두보로써만 인정을 받는다. 
 
칸트는 선험적 지식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선험적 지식은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지 못했다. 예를 들어 두점을 잇는 직선이 가장 가깝다라는 진리. 이 진리를 사람은 경험하지 않고도 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이런 선험적 지식문제를 피히테는 절대자아로 해결했지만 결국 거대한 독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럼 다시 컴퓨터와 인간의 펌웨어(본유관념)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비교하기 쉽게 알파고를 예로 들자. 알파고를 부팅했을때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인식하는가? 펌웨어로 알고 있는가? 경험으로 알게 되는가? 펌웨어와 경험이 종합되는가? 이 종합되는 과정이 나의 안에서 이뤄지는가(피히테) 안과 밖의 교류를 통해서 진행되는가(칸트)? 중요한 것은 사물자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자체(사물자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서양철학의 주제는 신들림이다. 서양철학의 시작은 사이비 종교에서 시작한다. 그 종교에서 사람들을 빼내오기 위한 노력에서 서양철학이 시작한다. 우리는 신들림을 물아일체로 표현한다. 나와 사물이 일치하는 광기를 일컫는다. 영어로는 enthusiasm. 열정, 열광이라고 한다. 고대사람들은 이러한 신들림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이는 변질한다. 이른바 '박카스' 축제다. 사이비 종교처럼 매음굴로 변질한다. 서양철학은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enthousiasmos. enthusiasm의 어원이다. en=into. theos=신. 신이 내 몸안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다. 우리는 신바람이나 신들림이라고 말한다. 미치다. 혹은 及. Mad도 같은 의미다. 경지에 오르다. 지미핸드릭스의 기타를 예로 들 수 있다. 탈레스는 변화를 얘기했지만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어 불변을 말한다. 이는 신화에서 드러난다. 아폴론. 희랍사회의 질서유지와 권력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민간신앙은 신이 내몸으로 들어오신 것. 그 집단에서는 다 신이 된다. 남녀노소가 없다. 여기서 엑스타시스(황홀경)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ekstasia. ek=off. 인간과 신 사이 간격이 사라지는 것. 하지만 이는 광란으로 변질된다. 바쿠스. 박카스는 이 광란의 매음굴 축제를 의미한다. 태초에 디오니소스
 
민간종교는 인간을 구원하는게 목적이었다.
구원은 광란으로 변질된다. 구원의 갈망. 박카스.
여기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빼내올지가 희랍철학의 목적이다
 
구원의 방식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할 것인가? 여기서 이성을 이용하게 된다. 박카스 축제의 안티로 희랍철학이 등장한다. 희랍철학은 신과 인간이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사이비 종교에서 말하는 'athanatoi(신은 죽지 않는다)'와 'thnetoi(인간은 죽는다)'라는 말은 근사하게 들릴 뿐이다. 종교는 결국 영혼을 만들어낸다. psyche. 영혼은 안죽는다는 것이 어원이다. soma=sema. 인간은 육체만 죽고 영혼은 안죽는다는 말이다.
 
태초의 종교는 오르페우스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예수교와 유대교를 낳았다. 오르페우스는 인도에서 불교형태로도 나타난다. 혼은 윤회를 하고 깨끗할수록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카타르시스. 혼을 정화된 상태로 간직하느냐 마느냐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 이 태초의 종교. 오르페우스에 입각한 철학자가 피타고라스다.
 
실제 피타고라스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다.
피타고라스 말에 의하면 "pshche로 보면 우주는 수다".
사이비 종교였지만 이로 인해 신학에서 철학이 이후 철학에서 수학과 과학으로 이어진다. 
 
cosmetics=cosmos. 우주는 수적인 법칙으로 아름답게 장식됐다는 의미다. 피타고라스가 한말이다. 우주가 질서라고 말한 사람이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생각을 종교에서 이성(로고스)으로 옮겨놓았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질서를 수로 바라봐서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
 
이는 자신의 로고스에 따라서 세상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와 불변에 관한 논의가 이성과 종교로 갈라진다. 우리의 문명은 이런 어리석은 논의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럼 철학이 할일은 무엇인가? 이제는 언어에 속지 말고 객관적을 세상을 정리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현재 우리의 삶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현대논리학과 분석철학
 
러셀,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레게다.
그는 현대 논리학과 분석철학을 개척했다. 특히 언어가 인간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고 철학을 명료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분석과 언어의미론이 바로 프레게에서 시작된다.
 
언어철학과 분석철학은 무엇일까? 바로 언어의 뜻과 지시체에 관한 이야기다. 언어의 의미에 관한 문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의미가 명료하지 않아 세상을 이해하고 기술하는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로 세계를 기술한다. 일상언어로는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로 표층에 있는 문법과 논리구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탁석산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말을 하는 것과 언어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상의 언어로는 철학이 되지 않는다. 즉, 생각과 사유를 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프레게가 해결하려고 했다. 일상언어를 논리화해서 이상언어로 만드는 작업. 이를 통해 언어로 철학을 해야 세계를 명료하게 기술할 수 있다.
 
일상언어를 철학으로 번역하니 의미론적 값이 이상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유명사는 지시를 의미하는 지시체다. 
 
박민호는 박민호를 의미한다. 문재인은 문재인. 김정은은 김정은이다. 트럼프는 트럼프. 시진핑과 아베도 마찬가지다. 그럼 홍길동은 무슨 의미인가? 홍길동의 지시체는 없다. 단어의 의미도 없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라고 하는 문장이 존재하나? 고유명사를 지시체라고 봤을때 생기는 문제다. 홍길동을 지시하는게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개밥바라기. 밤에 뜨는 별로 evening star. 샛별. morning star. 둘다 금성이다. 만약 '개밥바라기가 샛별이야'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것을 안다면 단어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개밥바라기는 샛별인다의 문장의미를 안다. 하지만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지시체는 개밥바라기와 샛별을 다르게 지시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같은 금성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위의 말은 거짓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개밥바라기가 샛별이야'는 참과 거짓을 구분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트럼프는 이순신을 이순신이라고 생각한다는 참이다. 하지만 이순신을 충무공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짓이다. 트럼프는 충무공이 누군지 모른다. 그런데 고유명사에서 이순신과 충무공은 같은 의미다. 트럼프는 왜 위가 참이고 아래는 거짓이라고 생각할까? 고유명사를 지시체라고 생각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고유명사의 의미는 지시만 있는게 아니라
뜻도 있다는 점이 밝혀진다. 이른바 semantic value로 '의미'.
 
홍길동이라는 지시체는 없지만 뜻이 있어서 문장이 의미가 생긴다. 햄릿의 지시체는 없지만 뜻이 있어서 의미가 생기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연수'. 이 지시체는 없지만 의미는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를 한다. 대한민국에서 평균연봉을 받는 사람. 2,358만8462.38원. 실제 이런 사람은 없다. 지시체는 없다. 하지만 뜻은 있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결국 의미는 알지만 참인지 아닌지 모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뜻과 지시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공을 얘기할때 무슨 공인지 모르는 경우다. 
 
삼각형의 무게중심이 있다고 하자. 이는 삼각형 각각 내각에서 맞은편 변 한 가운데로 그은 선이다. 이를 중선이라고 한다. 같은 지시체다. 하지만 의미가 다른 경우를 이와 같다고 보면 된다. 개밥바라기와 샛별의 지시체는 같다. 하지만 뜻은 다르다. 강릉 경포대에는 달이 6개 뜬다. 술, 호수, 바다, 하늘, 그대 눈. 내 망막에 비친 달.
 
하늘의 달만 지시체고 나머지는 다 뜻이 다르다. 내 망막은 인상이다. 지시체는 객관적이고 인상은 주관적이다. 하늘의 달을 제외한 나머지 달들은 관찰자 의존적이지만 주관적은 아니다. 다 똑같은 달이다. 관찰자 의존적이지만 객관적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주관적이라면 말이 안통한다. 언어는 결국 지시체와 인상사이에 걸쳐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호날두를 떠올리자. 어떤 지시체가 생각나는가? 인상을 보면 돈, 선수, 노쇼 논란 등이다. 뜻은 객관적인 공통성을 나타낸다. 아마 인성 쓰레기가 생각날 것이다. 언어를 분석하면 철학은 명료해진다. 이렇게 지시체만 의미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생긴다. 고유명사에는 지시체와 뜻이 함께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이유로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자신의 논리를 뒤집고 실천사유와 언어게임으로 세상을 명료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프레게의 명언.

"수학자는 반이 철학자여야 한다. 철학자는 반이 수학자여야 한다"
 
 
변화 공포증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 한다. 변화 앞에서는 몸도 마음도 불편하기 때문이다. 변화앞에서는 오래된 습관을 버려야 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이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의 심리가 문제다.
 
우리는 보통 영원과 불변이라는 단어를 쓴다. 영원과 불변은 다른 의미다. 영원은 '시간속에서 변화하면서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변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불변은 없다. 영원만 있다. 
 
"우리의 사랑은 영원해"는 맞는 말이다.
"우리의 사랑은 불변해"는 틀린 말이다.
영원한 것은 존재하고 불변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영원과 불변이라는 단어는 왜 중요할까? 바로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게 만드려는 노력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변하는 것을 불변으로 포장한다. 언어속에 가두고 관념화 시킨다. 이는 사람사회에 많은 문제를 낳게 된다. 인간사회에서 고민은 '변한다'와 '변하지 않는다'의 고민속에서 시작된다. 이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의 문제다. 미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철학의 지속적인 문제다.
 
철학은 끊임없는 형이상학과의 투쟁이다. 또 끊임없는 형이상학의 건립이다. 형이상학은 '불변하는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철학은 '불변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변한다'라고 주장한다. 그것을 건립하고 해체하려는 반복의 역사다.
 
결국 변화와 불변이 가장 큰 문제다. 철학은 탈레스에서 시작됐다. 사실 탈레스가 문제를 제기하고 모두 해결했다. 이후 철학은 아낙시만더,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진다. 이들은 밀레토스 사람들이다. 서양 철학은 아테네 이전에 터키 서부 서쪽 해안인 밀레토스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희랍철학이 꽃을 피운다.
 
탈레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세상의 다양한 변화가 있는데 자신은 불변하는 지속한 것이 있다"
 
즉, Arche=원질=substance가 있다는 것이다. 탈레스는 만물이 물이라고 했다. 변화와 불변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물은 1, 변화는 多라고 했다. 이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신화에서 이성으로 옮겨온 것이다.
 
잘 생각해보자. 사람도 물이다. 생명도 모두 물이다. 신이 만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때를 이 시점으로 본다. 
 
하지만 '영원'한 것에 대한 '불변'의 포장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탈레스는 '영원'을 말했다. 사람들은 '불변'으로 오해한다. 바로 변화에 대한 공포증 때문이다. 영원과 불변을 혼용하면 안된다. 불변은 시간을 초월하는 changelessness. 영원은 시간속에서 존재하는 permanence다.
 
탈레스는 만물은 모두 변하고 사라진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멸하는 신, 종교, 사랑,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변화의 공포증이 이유다.
 
이로 인해 사람은 '불변'을 언어로 포함시켜 관념화시켜버린다.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영원해야지" 이는 변화속에서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까지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 사랑 변하지 말자" 모순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변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원과 불변은 그래서 다르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생명이 불변할 수는 없다.
 
변화속에 내재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 탈레스는 물. 메네스는 공기라고 했다. 공기가 불이 되고 물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도를 도라고 언어로 규정한다면 개념화된 도는 상도가 아니다"
 
시공속에 존재하는 도는 언어적 관련성을 거부하고 들어가야 한다. 이 세상은 관념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탈레스에서 철학이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모든 것이 해결됐다. 
탈레스는 불변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철학사는 불변으로 오해했다. 불변은 형이상학적 태제다.
 
사랑도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간단한 생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해결이 안되는 것은 변화를 공포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변이라고 정의내린다. 스스로를. 사회를. 국가를. 사랑을. 정의를.
 
천만에.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을 세운다. 정작 변하지 않는 것을 보지도 못하면서. 인간은 변화에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불변을 찾으려고 하다보니 영혼이 생긴다. 종교가 만들어진다. 변화와 불변이라는 테제에서 결론은 이미 탈레스가 내렸다.
 
왜 우리는 변화를 공포스럽게 생각하나? 도를 불변의 도로 말하지 말라. 도를 도라고 말하지 말라. 언어속에 넣지말라. 변하는 그대로 둬라. 변하는 것이 도다. 동양은 오히려 변화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주역이다.
 
변화에 대한 공포증은 사막문명의 공통점이다. 모든 종교가 사막에서 나왔다. 변화공포증이 천당과 지옥의 관념을 만들었다. 언어의 절대성을 만든다. 이상한 형이상학을 계속 구축한다. 그럼으로 종교와의 투쟁을 철학이 선언하게 된다.
 
변화와 불변의 싸움이다. 철학자도 가끔 실수를 한다. 맑시즘도 변화속에서 설정했으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변화속에서 공산사회를 추구했다면? 물론 실제 공산주의는 그런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철학은 '~것'이 아니다. 사고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철학을 안하고 세상일을 할 수는 없다. 일상적인 삶속에서 사고하는 법을 명료하게 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정확히 말하면 철학이 아닌 '철학함'이다. 생각이 아닌 '생각함'이다. 우리가 하는 사고는 우리 것이 아니다. 수천년동안 쌓여온 철학사 중 한 사조의 유형에 불과하다.
 
철학은 중국과 서양간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인간 언어 장난이 제일 크다. 언어에 갇혀 있는 인간의 사고 일 뿐이다. 철학은 언어가 아닌 보편적인 몇가지 주제가 있을 뿐이다. 문화적 유형에 따라 특수하지 않다. 사람일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철학은 생각함이다. 그래서 개인이나 사회문제는 인간의 보편성에서 모두 다 용해된다. 모든 것은 인식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독특하지 않다.
 
인간이 가야할 길.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존재하는 원질. 그래서 생각은 무궁무진하다. 단 '만물이 변화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생각은 영원하다. 
 
 
운명은 있을까?
 
우주는 계획된 것일까?
 
신은 존재하나?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일까 별개일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는 것일까?
 
그림을 보자. 잭슨 폴록 no.5. 작가는 말한다.
  
"우연은 없다. 계획된 것이다"
 
 
그냥 페인트를 뿌렸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계획된 모양으로 뿌려진 것이라 말한다.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싸 하다.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퍼진다. 퍼진다는 것은 정해졌다. 단지 어떻게 퍼질까를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담배연기는 퍼진다'라는 사실이 불변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정도와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 뿐이다. 
 
모든 것은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알 수 없다. Que sera sera. 케 세라 세라. 될대로 되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있다 . 모든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
 
어김없이 해는 뜬다. 내일도 뜬다. 모레도. 1년 후에도 뜰 것이다. 하지만 내일 해가 뜬다는 보장은 없다. 해가 뜬 것을 보고 나니 떴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내일 해가 뜨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뜨지 않으면 뜨지 않는 것이고 뜨면은 뜨는 것이다. 정말 내일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다.
 
공룡입장에서는 어느날 해가 뜨지 않았을 것이다. 해가 뜨지 않든 공룡처럼 어느날 해를 보지 못한채 죽든. 해가 뜨고 안뜨고는 이상한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정해진 원리다. 혜성이 지구와 충돌해 공룡이 멸종할 것이라 예측했을까? 우주안에서는 그런 충돌은 흔하다. 물리법칙이니 이또한 정해진 것이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태양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0.0000000000000001% 정도 된다"
 
그리고 이어 말한다. 

"우주 전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 정도 된다.
그래서 태양계가 존재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우주에 지성을 가진 동물이 나올 가능성은 위의 것들보다 더 적다. 우주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지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 없다. 태양계나 우주나 없어지고도 남을 확률인데 그보다 더 적은 확률인 '인간의 탄생 가능성'이 무슨 대수인가. 정해진 법칙대로 우주가 돌아간다면 확률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해진 것. 그리고 정해지지 않은 것. 선택할 수 있는 것. 선택할 수 없는 것. 우리는 그 법칙을 모른다. 다만 현상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추측을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왜 4대성인이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딱 하나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안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르침 볼도의 채소를 기르는 사람>
 
 
나는 누구인가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커녕 사물 자체도 알 수 없다. '종이컵'이 무엇인가? 종이로 만든 컵인가? 종이는 무엇이고 컵은 무엇인가? 한없이 본질을 파헤치면 대체 사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서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디에서 왔는지 조차 모르는데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다.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은 오래됐다. 오늘은 피히테의 '절대자아'를 살펴보자.
 
흄은 주체란 관념의 다발에 불과하다고 했다. 법칙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자기자신 혹은 사물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를 칸트가 깼다. 사물자체는 알 수 없다. 주체가 대상을 파악할때 사물자체가 아닌 현상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물자체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러지 말자. 그러면 신까지 부르게 된다"고 말했다. 
 
칸트가 제안한 방식은 이렇다.

진리의 위치를 사물에서 인간으로 옮기자.
그리고 인간이 사물을 판단하는 형식이 무엇인지 따져보자.
그게 진리다. 진리는 사물이 아니다. 인간 그 자체라고 칸트는 선언한다.
기존 근대 철학의 사고 방식을 뒤집었다. 이후 생각은 헤겔로 이어져 발전한다.
 
칸트는 선험적 주체를 말한다. 선험적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선험적 지성은 일종의 범주다. 경험 이전의 것이다. 본유관념이다. 잡다한 자료를 정리하고 종합하는 그 능력이 선험적 지성이다. 일종의 범주가 있어야 종합적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흄의 경험론과 데카르트의 선험이론을 통합시켜 선험적 종합판단을 말한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3권의 책이다. 칸트 이후 피히테와 셸링, 헤겔이 이를 이어받는다.
 
우리는 왜 이런 문제에 집착할까? 특히 철학자들은 왜 먹고사는 것과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까? 그것은 간단하다. 철학의 틀을 정립해놔야 실제적인 것들을 포괄해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칸트의 주장에 반기를 든 사람이 피히테다. 근대철학과 자아. 칸트의 선험적 주체는 확실하면서 공허하다고 말한다. 사물 자체를 판단할 수 없으니 이런 형식만을 따져보자는 것이 칸트다. 예를 들어 맛이 있는데 맛을 알 수 없다는 것. 존재는 있는데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격한다. 칸트의 말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피히테는 사물 자체를 우리 인식의 틀 자체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주체와 사물 자체 모두 자아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아다. 상대를 통해 나를 아는 것처럼. 사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는 것처럼. 피히테는 말한다. 경험과 본유관념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선험적 주체를 인식하는 것들이 반복되는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논란은 계속됐다.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칸트의 주체는 형식만 판단하면 진리다라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로 피히테는 "말장난 하지 말고 주체와 물자체 모두 자아라고 보자.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아"라고 선언한다.
 
자아와 파생된 비아. 주체와 대상을 연관시켜주는 것. 이것이 자아라고 한다. 이른바 절대자아다. '나'는 누구인가. 내 육체가 자아인가? 인식도 안되고 경험도 안된다. 자아는 단지 활동의 결과로 스스로 드러날 뿐이다. 간접적으로. 절대적 자아 안에 작은 자아와 사물(비아)가 충돌한다. 이렇게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
 
피히테는 헤겔의 변증법을 먼저 말한다. 테제와 안티테제 그리고 진테제. 이로 인해 자아를 경험하기도 전에 있는 것들이 정립된다. 증명하지 않아도 자아는 존재한다. 피히테는 말한다.
 

"칸트처럼 증명하려고 하지 말자".
 
데카르트는 자아를 찾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사유자체가 진리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한 이유다.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피이테는 그냥 그 자체가 자아니 그렇게 알자고 넘어간다. A=A다. 자아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절대자아가 존재함으로써 정립이 된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Freiheit
 
Free는 행위의 자유. Freiheit는 자유의지다. 미래는 결정돼 있을까? 오래된 고민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우리는 냉면을 먹을까 말까 고민한다. 선택은 자유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자. 
 
미래는 결정돼 있는가. 아니면 미래는 결정돼 있지 않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미래는 결정돼 있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정론. 반대로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론. 이외에도 미래는 결정돼 있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도 있다는 양립가능이론.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길에서
소변을 본다. 강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개는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길거리에서 소변을 본다면 어떨까?
인간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미래가 결정돼 있다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도덕적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의지가 없으면 도덕적 책임이 면제된다. 이런 주장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자유의지가 있어 보일 뿐이라는 것.
 
한편 미래는 결정됐고 자유의지도 공존한다는 약한 결정론. 자유의지가 있기는 있다. 하지만 세계가 결정돼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생긴다. 그래야 선택이 생기기 때문이다. 양립이다. 미래는 결정돼 있고 이로인해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바로 필요와 선택. 영화 매트릭스에서 설계자가 네오에게 한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세미양립가능 주장도 있다. 미래는 결정돼 있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없지만 도덕적 책임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철수가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다. 행위자인과다. 사건인과로 보면 철수가 아닌 돌이 유리창을 깼다. 결과는 행위 그자체에 의해서 일어난다. 돌이 던져져서 깨진 것이지 철수가 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비인과적인 주장이다. 
 
미래는 결정됐지만 자유의지 또한 존재한다는 의견은 뭘까. 약한인과관계다. 즉, 결정된 미래와 자유의지는 확률적이고 통계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양자역학이 대표적이다. 자유의지가 있지만 확률적 통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된 미래 안에서 자유의지로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 둘은 양립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이것은 인간이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와 있다를 결정한다. 결정론을 다시 보자. 뉴턴은 결과가 원인에 기인한다고 했다. 넓은 의미의 결정론은 숙명론, 블록우주이론으로 나뉜다. 즉, 원인과 결과의 그물속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논리에 의한 미래결정론의 논증도 있다. 201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했다. 이 명제는 2013년에도 참이다. 미래에서도 참이다. 왜냐면 명제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22년에는 브라질이 우승한다는 명제는 참인가? 만약 그렇다면 프랑스의 사례처럼 2019년도 참이다. 명제의 진리값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거짓이라면 과거, 미래, 현재 모두 다 거짓이 돼야 한다. 논리적 결정론이다. 이것은 퍼트남이 제시한 논증으로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동시사건임을 말한다. 블록우주이론이다. 현재, 과거, 미래는 결정돼 있으며 각각 이곳, 저곳,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
 
신학적으로 살펴보자. 신의 계시속에서 결정돼 있다는 이론. 더 말할게 없다. 신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과학적인 실험으로도 보자. 벤자민 리벳의 실험. tv화면 속 시계를 보고 버튼을 누르고 싶다고 느낄 때 누른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생각한 시간을 기록한다. 시간을 보고 누르는 시간도 동시에 기록된다. 실험결과는 어땠을까? 자유의지가 생겨나기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이렇게 되면 자유의지가 한일은 없다.
 
그럼 이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논리를 보자. 자유의지 논증이다. 직관에 의한 논증. 이 글을 왜 보는가? 이유가 없다. 그냥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다.
 
정신에 의한 논증. 생각은 두뇌에서 나온다. 두뇌는 물리법칙이 적용된다. 생각이란 진짜는 아니고 두뇌의 물리법칙에 대응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다. 정신은 두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즉, 정신 자체가 별개로 존재하고 있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각기동대를 참고하면 된다. 정신은 물리법칙인데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이다. 
 
정신은 두뇌다. 두뇌의 생화학, 물리적 작용으로 움직인다. 즉, 분자와 원자. 양자역학을 따른다. 입자의 위치는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정신에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논리가 형성된다. 즉, 확률적 결정도 정해진 결과값이지만 이를 선택하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유다는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미래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확률이 0.01%만 있어도 미래결정론은 부서진다. 이에 미래는 결정됐지만 이를 확률적으로 선택하는 자유의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매트릭스에서 설계자가 네오에게 '필요와 선택'을 말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

대체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어느 손을 들지 말지는
자유롭게 선택한다. 먼저 '자유'라는 인간의 단어 때문에 헷갈리게 된다.
자유와 자유의지는 다른 것이다.
 
FREE는 자유롭다, 비어있다, 공짜다라는 의미다. 이 안마의자는 free하다라는 말은 공짜다와 비어있다로 혼용된다. 사용하려면 돈을 내라 혹은 공짜지만 자리를 맡아놨다로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행위의 자유는 Free, 의지의 자유는 Freiheit로 구분해야 한다. Freiheit는 칸트가 한 말이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보자. 의사는 이런 생각을 한다. "대체 왜 담배를 못 끊지? 내가 피워보면 그 심리를 알까?" 담배를 못끊는 환자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한다. 둘의 욕구는 어떤가? 의사의 담배 욕구와 중독자의 욕구. 환자는 흡연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의사는 흡연욕구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1차적 욕구와 2차적 욕구다. 욕구들에 대한 욕구를 2차적 욕구라 한다. 담배를 끊기 원하면서 피운다. 이는 2차적 욕구인 자유의지를 실현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실현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다. 
 
1차적 욕구는 행위의 자유다. 인간은 2차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할때 제약이 없다는 말은 행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할 자유의지가 있다는 의미다. 다시 보자. 소설가가 피우는 담배. 마침 담배가 없다.
 
못피우니 행위의 자유가 없다. 하지만 자유의지도 없는가? 고로 행위의 자유는 자유의지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맬 깁슨과 소피 마르소 영화에서 볼 수 있다. 목이 도끼로 날아가기전에도 'Freedom'을 외치는 것. 자유를 속박당한다고 해서 그 자유의지까지 묶어 둘수는 없다. 
 
그래서 미래는 결정돼 있지만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바꿀수 있다는 논리가 나온다. 물론 결정된 미래 중 확률적인 범위내에서다. 동물은 1차적 욕구만 있다. 인간은 2차적 욕구도 있다. 1차적 욕구가 2차적 욕구를 집어삼키는 현상. 자유의지가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매어 있다고 해서 자유를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몸이 자유롭다고 해서 모두 자유를 가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 둘다 어딘가에 메어 있지 않아야 한다.

"몸과 마음이 어딘가에
메어 있으면 그것이 노비다"
-드라마 추노
 
그럼 2차적 욕구가 1차적 욕구를 제어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라이프 오프 파이'. 고래가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습을 본 호랑이의 표정이다. 호랑이는 1차적 욕구. 고래는 도덕적 존재인 2차적 욕구를 의미한다.
 
다니엘 데닛이라는 학자. 세계가 결정적이라서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진화된 기계라는 것.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정보를 필요로 한다. 몸 전체에 정보를 저장한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카멜레온 처럼. 인간은 조금 다르다. 기질, 기억, 재능, 의지. 이런 것들은 뇌속에만 아니라 몸에도 있다.
 
그런데 언어를 사용하면서 정보를 문화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문화에 저장하는 정보량은 상상불가다. 엄청난 정보를 활용하는 인간. 본능은 몸 안의 정보만 사용하는 꼴이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이렇게 문화 정보를 이용해 예측된 결과를 피하는 것.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설명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이유를 제시하는 기계다. 지구에서 독보적인 '선택하는 기계'. 필요와 선택. 행위의 자유와 자유의지는 다르다는 점을 기억하자.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못 끊으면 자유의지가 부족한 것이다. 그것은 행위의 자유만 있다. 자유의지를 실현하지 못한 것이다. 칸트가 말한 자유는 Freedom이 아닌 Freiheit다. 그래서 베토벤도 '자유의 송가'를 Ode to Freiheit로 만들었다. 언젠가는 인간이 정해진 미래안에서 자유의지로 이를 극복해 나가기를 바라면서.
 
  
미래는 결정됐을까?-2편
 
미래는 결정돼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살고 있다. 그리고 미래는 다가온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고 미래를 개척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그곳과 이곳, 저곳에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것은 의미없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지금만 존재할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이라는 시간의 연속이다.
 
미래가 결정됐다는 이론은 결정론, 숙명론, 블록우주이론으로 구분한다. Determinism. 결정론은 원인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의 그물에 걸쳐있다. 초기조건과 자연법칙을 알면 예견이 가능하다는 것이 결정론자들의 주장이다. 뉴턴과 라플라스가 대표적이다.
 
라플라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주의 모든 입자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실제 입자의 위차와 속도는 점점 가깝게 예측되고 있다. 이것을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숙명론은 Fatalism이라고 한다. 운명론과 숙명론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숙명론은 이렇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도록 되있다"
 
Qeu sera sera. 케세라 세라. 우리말로 '될대로 되라'다. whatever will be.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나니 될대로 되라. 결정론은 미래가 과거와의 인과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결정론이 우연일까? 왜 인과가 우연인가? 인과라도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것은 인과법칙 자체가 우연이라는 것. 초속 10만킬로로 달리는 빛이 있다. 만약 초속 10만킬로 였다면 어땠을까? 초속 30만킬로로 달리는 것은 우연이다. 9.8m/sec는 중력 가속도다. 이것들은 우연히 결정된 것들이다. 만약 중력 가속도가 9.7m/sec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필연적인 요인이 우연히 결정된 것이다. 고로 우연적인 원인들로 필연적인 결과가 나온다. 결과자체가 우연한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숙명론은 그냥 미래가 결정됐다는 것이다. 우주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질서, 신. 이유는 없다. 필연적인 막무가내다. 왜 일어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블록우주이론. 과거는 없고 현재만 있다. 미래도 없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됐다는 것은 착각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현재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구분하는 것은 착각이며 의미가 없다. 즉,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영원주의라고도 하며 4차원주의라고도 한다.
 
시간과 공간은 비슷한 개념이다. 실제 공간의 궤적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1초, 2초, 1분, 1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공간의 이동거리와 속도의 개념이다. 시간은 착각이다. 공간은 특별하지 않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그곳으로 가면 그곳을 본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과거, 미래도 특별하지 않다. 그냥 지금일 뿐이다. 

"지금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저가 강을 건너면서 한 말이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지금이나 미래나 이미 결정돼 있고 이미 발생하고 있다. 공간처럼 시간도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신이 존재한다고 하자. 신은 시간을 어떻게 볼까. 500년전 과거를 회상하며 '이순신을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현재를 볼까? 카타르 월드컵때 "브라질이 지난번에 망신당했는데 이번엔 우승시켜줄까?"라고 계획할까? 신이 있다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째로 본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에게 의미가 있지 신에게는 '따위'에 불과하다.
 
신이 역사를 관장할까? 역사를 만들고 조정할까? 그렇지 않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조정하는지 아닌지 모른다. 역사를 편집하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연, 필연, 그냥, 인과법칙 등은 문제가 안된다.

"우주는 그냥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블록우주이론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우주는 그리고 미래는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문제다. 그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 문제다. 다음시간에 알아보자. 
  
미래는 결정됐을까?-1편
 
미래가 정해졌다는 것은 결정론이다. 인과적 관계다.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 되서 미래의 결과를 정하는 것. 이는 17세기 뉴턴에서 시작됐다. 인과적 결정론이다. 그리고 19세기 라플라스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20세기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결정론은 위태로워진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양자역학과 결정론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과거에 의해 미래가 결정돼 있다는 결정론을 먼저 보자. 
 
아리스토텔레스 우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있고 달이 돈다고 했다. 수성이 지구를 돌고 금성과 태양도 지구를 공전한다고 믿었다. 그 뒤에 화성과 목성, 토성이 돈다. 그외의 별들은 돌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수성위에 하늘이 있고 더 높은 곳에 하늘이 더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신이 사는 천상계로 에테르로 구성됐다고 믿었다. 지상계는 수성 아래이며 물, 흙, 공기, 불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 믿음은 2천년 이상 진행됐다. 
 
17세기 뉴턴에 와서야 지상계와 천상계가 같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유인력으로 설명됐다. 수성이 지구를 공전하는 것도 만유인력으로 당시는 설명했다. 지상계와 천상계 구분이 없어졌다.
 
이후 라플라스의 악마 이론이 등장한다. 인과관계 결정론의 절정이다. 피사의 사탑은 55미터다. 공을 떨어뜨리면 3.35초 후에 떨어진다. 무엇을 떨어뜨려도 결과는 같다. 이것을 물리법칙이라고 한다. 원인이 필연적 결과를 낳는 것. 즉, 원인이 결과를 결정해 놓았다는 의미다.  
 
우주초기의 자연 상태가 전 우주의 미래상태를 결정하고 있다고 해석가능하다. 이는 정신도 두뇌에서 나온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마찬가지다.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고 하자. 그럼 뉴턴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이것이다. 하지만 이런 운명론같은 결정론이 깨지기 시작했다. 바로 양자역학의 등장때문이다. 양자역학은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불확정성 원리. 입자의 위치가 결정되면 운동량이 불확실해진다. 반대로 입자의 운동량이 결정되면 위치가 불확실해진다. 결정론은 위치를 알면 운동량이 정확해진다. 결국 결정론과 양자역학은 정반대다. 양자역학은 이렇게 말한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르는데 미래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어떻게 알겠는가.
 
두개의 슬릿에 빛을 통과시켜보자. 관찰을 안하면 두개 슬릿을 파동으로 통과한다. 관찰하면 비로소 어느 슬릿을 통과할지가 결정된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입자의 위치를 안다고 하자. 그렇다고 입자의 미래를 알까? 양자역학으로는 다 깨진다. 미래는 그때가서 관찰을 해야한다고 정리가 된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입자의 위치를 알아도 미래는 모르게 된다. 즉, 원인이 다른 결과를 만들 수도 있게 된다.  
 
양자역학을 받아들이면 결정론이 포기해야 할까? 아니다. 양자역학을 받아들이면 현재를 안다. 미래의 위치도 확률적으로는 알게 된다. 양자역학의 결정론이 되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결정돼 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양자역학을 알려는 이유가 뭔가? 뉴턴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보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결정론도 양자역학도 인과적으로 비판받게 됐다. 결국 정반합으로 완성되는 과정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럼 결정론과 카오스 이론을 보자. 에드워드 로렌츠라는 기상학자. 기상예측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온도, 습도를 소수점 3번째만 기록했을 때와 4번째를 입력했을때 결과값이 엄청난 차이를 불렀다. 만약 A지점에 2.34라고 습도를 기록하면 날씨가 화창했다. 하지만 2.341을 입력하면 폭설이 내린다.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다. 카오스 이론이다. 베이징에서 나비 한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뉴욕의 허리케인이 생기는 이유다.
 
카오스는 결정론의 반대인가. 아니다. 단지 미래예측의 정밀한 정보가 많이 필요할 뿐이다. 소수점 몇백자리까지 감안해야 한다. 무한정보다. 사실상 정보처리가 불가능하다. 또 카오스 이론이 그럴듯 해 보이지만 논리적 비약도 있다. 카오스 이론은 이렇다.

미래 예측은 물리적,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비약한다.
이로 인해 미래는 결정돼 있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100미터를 5초에 달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논리가 깨지지는 않는다. 실제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결정론과 카오스 이론의 대립이다. 이로 인해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미래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모순이다. 결론은 양자역학의 시각에서 확률적인 결정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정론이 확률적으로 확대되면서 동시에 좁혀지게 됐다.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결정되지 않았다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럼 앞으로 더 나아가보자. 블럭구조이론. 결정론과 자유의지. 결정론과 숙명론. 미래는 결정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시간여행은 가능할까?
 
터미네이터. 기계는 존 코너를 없애기 위해 타임머신으로 1984년 L.A로 간다. 2027년에 출발한다. 맨인블랙3. 악당 보리스는 시간여행을 해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 미래 보리스는 팔이 한쪽 없고 과거의 자신은 양손이 다 있다. 동일한 사람인데 팔의 갯수가 다르다. 모순이다. 
 
루퍼라는 영화. 브루스 윌리스 주연이다. 2044년 텍사스. 미래에서 사람을 과거로 보내면 킬러가 죽인다. 한번은 미래에서 온 사람이 자신을 제압한다. 알고 보니 미래의 자신이다.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해서 미래의 조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것도 모순이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는데 어떻게 바꿀 수가 있을까.
 
시간여행은 가능할까? 우리가 오즈의 나라로 가지 못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는 못간다. 시간은 그런 개념이다. 이미 사라진 시간으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존재한다는 의미다. 
 
과거 역사를 보라. 미래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가? 그럼 과거는 사라진 것인가? 현재만 있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의미일까? 동일인이 다른 시간대에 존재할 수는 없다. 마치 커피가 뜨거우면서 차가울 수 없듯이.
 
물론 타임머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인슈타인 처럼. 과거, 현재, 미래는 각각 그곳, 저곳, 이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여행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뒤죽박죽? 시간여행론자들은 과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아직까지 밝혀진 것은 없다. 빛의 속도로 달리는 것을 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면 신의 영역에 다다르지 않을까?
 
 
금이 아닌 은본위제라면?
 
오즈의 마법사. 이 동화는 원래 온즈의 마법사이다. 금본위제를 은본위제로 바꾸자는 의도가 있었다. 금은 은보다 문제가 많았다. 먼저 왜 금이 화폐의 수단이 됐는지를 알아야 한다. 금은 안변한다. 다른 금속은 산소에 반응한다. 그래서 녹슨다. 금은 중금속이라 먹지도 못한다. 금은 자연에서 반응하지 않는다.
 
치아에 금을 넣는 이유기도 하다. 다른 금속을 치아로 만들면 부작용을 일으킨다. 금은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끈다. 귀금속으로 신분의 상징이 됐다. 무엇보다 금은 귀하다. 희소성이 있다. 희소성을 가진 귀한 금속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통주관성을 가진 금속은 금이 유일하다. 사실상 객관성에 가까운 화폐의 역할이다. 금에 시비를 거는 문명인은 없다.
 
과거에는 화폐를 소금으로 사용했다. Salary의 원어는 Salt에서 나왔다. 소금이 귀해서 돈으로 썼다. 조선시대에는 옷감이 돈으로 사용됐다. 화폐는 하지만 작아야 했다. 교환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닳아없어지지 않아야 했다. 딱 적당한 것이 금이다. 그리고 캐기가 쉽지 않아 양이 적다. 이런 이유로 서양은 금본위제를 썼다. 반면 중국은 은본위제를 사용했다. 은은 금에 비해 양이 많았다. 
 
하지만 금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금은 화폐공황을 유발한다. 희소성의 역설이다. 금값이 오르면 사람들이 유통을 하지 않는다. 팔아먹기 위해 축적한다. 금이 품귀현상으로 값이 오르는 것이다. 
 
물건을 많이 만들어 경제가 성장하면 금도 많이 유통되야 한다. 하지만 희소성으로 인해 물건이 만들어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금이 상대적으로 귀해져 값이 오른다. 유통되는 금이 부족하니 재테크 수단이 된다. 신용경색이 생겨 금값이 더 오른다. 결국 금을 더 움켜쥐려고 한다. 유통의 수단이자 축자의 수단이 된다. 
 
금으로 돈을 버는 세상. 악순환이 반복된다. 오즈의 마법사는 이런 이유로 온즈의 마법사를 의미한다. 은본위제가 되면 금으로 돈을 버는 악덕 자본가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주제다. 더 좋은 세상이 온다는 메시지다. 은이 더 많기 때문에 경제불황을 통제하기 쉽다는 것이다. 
 
결국 은본위제는 실패했다. 그리고 금본위제를 폐기하려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지폐로 바뀐다. 금은 무대 뒤로 숨었을 뿐 실제 수렴청정을 하고 있다. 금은 전략자원이 됐다. 한국도 IMF때 금을 사고 팔았다. 안그랬으면 망했을 수도 있다. 전세계 금의 50%는 미국에 있다. 세계 경제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마이 프레셔스를 외치는 이유.
 
  
우리는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앎이란 어디에 있을까? 우리 안에 있을까? 나의 밖에 있을까?  앎이란 무엇일까? 지식이란 정체가 무얼까?
 
앎에 대한 궁금증은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뉜다. 합리론은 앎이란 우리 머리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진다. 반면 앎이란 경험을 통한 것으로 감각으로 알게된다는 주장. 이것은 경험론이다.
 
로크에서 버클리, 흄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앎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앎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이말은 '우리는 정말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칸트가 집대성한다. 그리고 헤겔로 이어진다. 
 
경험론의 로크는 데카르트에 대비된다. 둘은 공통점이 있다. 지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과학혁명 시대에 살았다.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데카르트는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로크는 이성이 아닌 경험으로 앎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합리론과 경험론의 시작이다. 둘은 친 과학적 철학자다.
 
먼저 로크를 보자.

로크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지식의 원천에 관한 문제.
데카르트는 본유관념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로크는 본유관념을 믿지 않았다. 
 
로크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지식의 원천에 관한 문제. 데카르트는 본유관념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로크는 본유관념을 믿지 않았다. 
 
존 로크는 인식론을 주장한다. 본유관념은 무엇일까?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작가가 있다. 런웨이라는 SF공상과학소설.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명령어를 칩에 심는다. 두번째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명령어를 넣는다. 세번째, 로봇은 1,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설정한다.
 
인간을 최우선으로 지키고 명령에 따르라. 그리고 3순위가 자기를 보호하라는 명령이다. 이 3원칙은 메모리 펌웨어속에 집어넣는다. 지워지지 않는다. 3원칙은 훼손되지 않게 펌웨어 속에 저장된다. 인간에게도 펌웨어가 있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기학학과 수학적 원리다. 두점을 이으면 직선이다. 그것이 최단거리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알까? 누군가 가르쳐주면 알까? 아니다. 기학학과 수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안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안다. 
 
신, 주체, 실체의 관념. 이런 생각도 태어날때부터 안다. 로봇의 3원칙. 펌웨어. 인간은 이런 관념을 태어나면서 부터 갖는다. 이것을 본유관념이라 한다. 
 
로크는 이를 부정한다. 로크는 본유관념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기하학, 수학, 도덕, 자아. 이런 것은 경험을 하면서 가지게 된 개념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백지상태인 빈 서판이다. 경험을 통해 관념과 지식이 생긴다. 타불라 라사라고 한다. 이것이 경험주의의 출발이다.
 
로크는 말한다. 지식을 얻게 되는 프로세스는 무엇일까? 인간오성론이란 책에서 말한다. 인간은 색, 소리, 냄새, 맛, 촉각, 모양 등. 생각의 대상. 관념은 이로 인한 생각이다. 내적경험도 관념으로 생겨난다. 사고, 의욕, 기억, 추리, 판단. 이러한 단순관념들이 복합관념으로 발전한다. 복합관념이란 힘, 존재, 통일, 기쁨 등이다.
 
감각과 반성(머릿속의 사고과정)이 합쳐진 것이다. 단순관념은 수동적으로 주어진다. 여기에 오성(이성)이 결합한다. 생각하는 능력이 결국 오성이다. 단순관념은 복합관념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오성이 능동적으로 결합된다.  그럼 우리는 오성으로 어떻게 지식을 얻을까?
 
로크의 생각이다. 실체와 양태(실재의 부수물). 관계. 원인과 결과. 시간과 공간. 복합관념에서 지식이 나온다. 이것은 직관적 지식. 논증적 지식도 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내각합은 180도'. '신이 존재한다'. 이런 생각들이 논증적 지식이다. 반면 감각적 지식도 있다. '사과는 빨갛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감각적 지식은 확실하지 않다.
 
빨갛고 동그랗고 매끄럽다. 하지만 불을 끄면 검게된다. 누군가는 사과가 시큰한 맛일 수도 있다. 색과 맛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사과는 여전히 여전히 동그랗고 매끄럽다. 고로 사물의 1차 성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2차 성질인 맛과 향기다. 왜 2차성질은 변할까? 1차 성질은 본래의 것이다. 2차 성질인 색은 원래 성질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를 표상적 실재론이라고 부른다. 경험론에서는 이러한 오류와 논란이 생긴다. 바로 '그럼 사과는 진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진짜 사과가 무엇인지조차 알기 힘들다. 사과는 내머릿 속 이미지일 뿐이다. '빨갛고 단 과일'. 하지만 누군가는 분홍빛 시큼한 열매라고 생각한다. 사과는 머릿속에만 있게 된다. 
 
사과는 결국 경험론에 의하면 머릿속의 현상에 불과해진다. 관념론이다. 하지만 사과는 1차적인 불변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만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증명이 된다. 이것을 실재론적 입장이라고 한다.
 
경험론의 결론은 이렇다.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과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있다. 이것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경험은 항상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지각대로 존재하는 것. 빨간색은 나에게 표상되는 것. 보이는 것일 뿐이다. 표상적 실재론이다. 로크는 표상적 실재론으로 경험론을 결론낸다.
 
즉, 경험론의 결론은 이렇다. 경험으로 인한 지식은 감각적 경혐과 내적 경험이 있다. 이는 단순한 관념이 모여 복합적 관념을 이룬다. 실체와 양태, 관계.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지식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마침내 논증, 직관 등의 사고가 가능해진다.  
 
표상적 실재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우리가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경험으로는 이것을 구분하기가 힘들다.
오류를 많이 일으킨다. 그러면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맞는가? 지식은
우리 머릿속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떤 지식을
형성할 수 없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칸트가 훗날 종합적 정리를 한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자유의 송가
 
베토벤 환희의 송가는 원래 '자유의 송가'다. Ode to Freuden의 원제목은 Ode to Freiheit다. Freiheit가 Freuden로 바뀐 것은 검열 때문이다. 당시 자유의 송가라는 제목은 혁명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봉건 귀족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자유의 송가'라는 이름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면 느낌이 다르다.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다.
 
이 음악은 2차대전 당시 BBC가 시작곡으로 틀었다. 비록 적국 독일의 노래지만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무려 30년동안 기획된 곡이다. 이 곡은 쉴러의 시 '환희에 부쳐'를 가사로 한다. 합창은 초창기 프리메이슨이 즐겨 불렀다. 그들은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비밀결사조직이다. 1824년 초연을 앞둔 '합창'. 당시 사람들은 로시니의 음악에 열광했다. 이런 이유로 베토벤은 베를린에서 초연을 하려 했다. 하지만 빈의 음악가들이 간청해서 결국 베를린이 아닌 빈에서 초연된다. 1824년 5월4일. 하지만 음악이 어려워 초연은 사흘 연기된 7일에 열린다. 당시 음악가들은 레치타티보(연극의 대사처럼 노래를 부르는 것)가 어렵고 낮은 음역을 위해 콘트라 파곳을 넣어달라고 했다.
 
결국 베토벤은 승낙했다. 베토벤은 이 곡을 지휘하지 않았다. 귀가 안들려서다. 연주가 끝나고 소프라노 '웅어'가 허리를 굽혀 대신 답례했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연주에 맞춰 악보를 읽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연주가 이미 끝난 부분을 한참후에 넘겼다
 
그리고 지휘자는 악장이 끝날때마다 베토벤의 어깨를 두들겼다. 당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냉정을 찾고 책상앞에 앉아도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예술과 진실이 가장 빛나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더이상 역작은 없다
 
베토벤은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현악 4중주를 비롯해 금단의 영역을 구축했다. 브람스, 브루크니의 교향곡은 모두 9번 합창에서 시작한다.
 
기쁨이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낙원의 딸이여 천상의 것이여,
우리는 몹시 취하여 당신의 신전에 들어선 것이다.

당신의 능력은 시간의 흐름이 갈라 놓은 것을
다시금 결합시켜 준다.
모든 사람들은 당신의 날개가 멈추는 곳에서 동포가 된다.

껴안아라, 수백만 사람들이여!
너희 입맞춤을 온 세계에 주어라!
동포여, 별하늘 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살고 계시리라.
한 친구의 벗이 되는 큰 행운을 가진 사람은,
착한 여성을 차지한 사람은 그 환호 소리를 섞도록 하라!
그렇다 - 비록 한 영혼이라도
이 지상에서 자기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환호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자는
울며 이 결합으로부터 떠날지니라!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은 이 공감(共感)에 봉사하라!
이 공감은 미지의 존재가
군림하는 별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자연의 젖가슴에 매달려 기쁨을 마시나니
모든 선인이나 모든 악인이나 기쁨의 장미 발자취를 따라 간다.
기쁨은 우리에게 입맞춤과 도취를 주고
죽음의 시련을 겪은 친구를 준다.

쾌락은 구더기에게 주어지고
그리고 천사는 신 앞에 서 있다.
너희는 엎드려 있는가, 수백만 사람아?
너희는 창조주를 예감하는가,
세상 사람아? 별하늘에서 그를 찾아라!
별 위에 신은 존재하시리라.
기쁨은 영원한 자연에 있어서의 강한 용수철이다.

기쁨, 기쁨은 크나큰 세계의 시계 속에서
톱니바퀴를 돌아가게 한다.
기쁨은 꽃을 그 싹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별을 하늘로부터 이끌어 내며 기쁨은
천문학자의 망원경도 모르는 천체를
하늘에서 회전하게 한다.

창조주의 별이 장엄한 하늘을 날 듯이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동포여
너희 길을 나아갈지니
영웅이 승리를 향해 전진하듯
기쁨으로!

-환희에 부쳐 '프리드리히 쉴러'
 
베토벤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로 서로 의지하며 평등하게 살 것을 꿈꿨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다.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베토벤을 음악의 악성. 음악의 성자라고 부른다. 환희는 자유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서로 아끼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오리라 믿었다. 그의 생각은 자유를 향한 고귀한 신념과 숭고한 이상이다.
 
베토벤의 스승은 하이든이다. 그는 귀족에게 고용돼 부귀영화를 누렸다. 베토벤은 생각이 달랐다. 하이든을 보며 음악적으로 자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육을 하고 연주회를 열며 스스로 삶을 산다. 악보산업 덕분이다. 악보산업이 활성화 되면서 그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악보의 출판이 음악가에게 자유를 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냉혹했다. 독일 본에서 태어났다. 열등감에 절은 아버지는 베토벤을 혹독하게 키웠다. 방에 가두고 연주만 시켰다. 모차르트로 만들기 위해서다. 음악은 베토벤에게 저주이자 축복이다.
 
어머니마저 사망한다. 장남인 그는 동생들의 생계까지 책임진다. 지독한 인내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20대에 청력을 읽었다. 30대 초반에는 아무것도 안들렸다.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대미문의 걸작을 쏟아낸다. 이것은 기적이다. 자신 운명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이 운명교향곡으로 탄생했다. 시작하는 8개 음. 그를 기반으로 기존과 전혀다르며 아무도 못만들어낸 완벽한 곡을 만든다. '교향곡'을 창시한 것이다. '운명'은 너무 완벽해서 연주할때 마다 모든 곡이 다 다르다. 총 9곡의 교향곡. 3번은 영웅, 5번은 운명, 6번은 전원, 9번은 합창이다. 
 
  
베토벤 교향곡은 5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여덟개의 음을 중심으로 치밀한 구성.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의 비서다. 그는 이렇게 들었다고 증언한다.

운명은 이런 소리로 문을 두드린다
 
다른 나라는 'C단조 교향곡'이라고 부른다. 한국과 일본만 '운명'이라고 한다. 베토벤의 제자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노랑 촉새'의 노랫소리를 듣고 영감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파울 베커라는 독일의 음악사학자는 '운명'을 이렇게 평한다.
 
1악장은 투쟁, 2악장은 희망, 3악장은 의심, 4악장은 승리
 
프랑스 대혁명 뒤 변화의 한복판에 선 19세기. 시민계급이 귀족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분위기를 반영한다. 음악도 귀족에게 예속됐다. 귀족에게서 벗어나면 자유의 대가로 생계가 어려워진다. 베토벤은 그 운명의 올가미들을 모두 벗어난다. 베토벤은 프리랜서 작곡가로 매일같이 가계부를 썼다.
 
자유을 얻은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스승 하이든과 커피를 마셔도 베토벤이 돈을 냈다면 항상 가계부를 썼다. 음악가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많다면 자유을 잃는다. 역설적이다. 그래서 예술은 어려운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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