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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고르

에테르

2019-06-2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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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우주를 가득채우는 물질을 '에테르'라고 부른다. 모든 물질의 합. 그 물질은 분자, 원자, 핵, 전자로 구성된다. 이 모든 물질을 에테르라고 한다. 그럼 우주안의 모든 물질인 에테르를 없애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우주는 빅뱅으로 에테르가 만들어졌으니 없어지는 것도 가능하다. 과학자들은 우주안의 모든 물질이 사라지면 시간과 공간만 남는다고 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시간과 공간. 마치 장바구니에 물건을 가득 실었지만 다 비우고 나면 장바구니만 남는 것과 같다. 바가지 안에 모래를 넣고 성을 쌓는다. 모래를 비우면 바가지만 남는 것과 같다. 우주의 틀은 시간과 공간이다. 
 
이 에테르는 분자, 원자, 전자, 핵으로 구성된다. 앞서 우리는 우주의 에너지 근원이 빛이라고 했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전자의 밀고 당기는 힘으로 에너지가 생긴다. 그럼 전자는 어떻게 움직일까? 우리는 전자가 핵을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다. 마치 지구가 태양을 돌듯이. 달이 지구를 돌듯 전자가 핵 주위를 공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전자는 일종의 위치만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마치 디지털화된 공간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세상이 아날로그로 구성돼 있다고 믿는다. 아니다. 우주는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화돼있다. 예를 들어보자. 격자무늬가 바둑판처럼 있다. 전자는 그 작은 격자들을 움직인다. 격자에서 격자로 부드럽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격자와 격자 사이를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전자는 0과 1이라고 하는 '참'과 '거짓'의 이분법 처럼 격자의 경계를 초월해 이동한다. 순간이동이다. 이말은 전자가 움직이는 격자와 격자사이는 '없음'이라는 의미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있음과 있음 사이에는 '없음'이라는 경계가 필요하다. 0과 1 사이에는 없음이 있다. 그래서 0과 1로 명확히 구분된다. 있음과 있음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격자사이를 순간이동한다는 것은 있음과 있음 사이에 없음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우주가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화 된 구조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피부에 와닿는 사례를 들어보자. 제논이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즉 쏜 살은 날아가지 않고 정지된 상태가 연속된다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증명했다. A에서 B까지 날아간다면 그 중간을 반드시 통과한다. A와 B의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A와의 중간지점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이런식으로 한 거리의 중간지점을 모두 통과해야 화살은 날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지점을 계속 나누면 끝이 있을까? 무한대로 쪼개진다. 중간지점을 찾을 수 없다. 패러독스다. A에서 B까지 거리는 유한하지만 그 안쪽은 무한이다. 
 
 
삼각형도 마찬가지다. 양변의 길이가 1cm인 직각삼각형. 이 삼각형의 빗변 길이는 루트2다. 루트2는 1.414...로 무한대다. 양 꼭지점을 잇는 직선은 유한하지만 그 길이는 무한이다. 우주는 이렇게 구성돼 있다. 유한과 무한은 같다. 무한은 유한에 갇혔다. 그래서 무한안에서 손을 뻗는다고 해서 유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제논의 역설처럼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작은 순간과 공간을 이동하고있다. 그 공간이 연속되면서 우리 눈에는 날아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면 그 공간들은 경계가 있을까 없을까? 전자와 핵사이에는 빈공간이 있다. 공간 자체가 없다. 그래서 디지털화된 공간을 순간이동한다고 했다. 그러면 대기권도 마찬가지다. 화살은 아날로그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없는 공간'을 초월해 순간이동을 하고 있다. 즉, 화살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하는 분신술처럼 운동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지만 실제로 전자는 이렇게 운동을 한다. 화살이라고 다를 바 없다. 인터스텔라에서 나오는 순간이동.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주안에서 이동은 이렇게 디지털화된 공간 사이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불확정성 이동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 신체도 불확정성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믿지 못하겠지만 그렇다. 
 
1.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정의하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다. 아름답다고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것은 '예쁨'이다. 예쁘다와 아름답다는 다르다. 보이는 것은 예쁨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잡아두려는 경향이 있다. 아름다움은 잡히지도 않는다. 잡아둘 수가 없다. 잡으려는 순간 손에서 신기루처럼 빠져나간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자기 자신도 소멸하고 만다. 허탈함으로 가득해진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자신은 적당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 그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형태가 없다. 본질만 있다. 그림을 보자.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다.
 
 
이 그림은 마티스의 부인을 그린 그림이다. 색깔이 화려하다. 당시에는 멋있는 모자와 옷이 유행했다. 자신의 부인을 그리면서 화려한 색으로 표현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의 색을 사용했다. 화가들은 보이는데로 그리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린다.
 
아내의 얼굴에서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아름다움이란 무슨 색인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느낌은 있지만 표현할 수 없는 정체.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다음 그림은 '슈비터스를 위한 C'이다.
 
 
클레의 그림이다. 슈비터스와 클레는 친한 사이였다. 클레는 슈비터스에게 이 그림을 헌정한다. 종이 뒤에 물체를 대로 탁본을 뜨듯 그렸다. 당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붓으로만 그렸다.
 
클레는 다른 형태로 작품을 만들었다. 슈비터스도 마찬가지다. 꼴라주 기법으로 새로운 미술의 영역을 만든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이다.
 
 
잘 보면 남성같다. 또 여성처럼 보인다. 프리다는 여성이다. 하지만 강인한 자신을 남성으로 표현했다. 프리다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고생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누워서 산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끝없이 그림을 통해 극복한다. 이 그림은 그녀의 용기와 욕망을 보여준다.
 
왼쪽의 원숭이는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욕구. 오른쪽의 퓨마는 강인한 정신. 목걸이의 벌새는 작지만 가장 빠른 조류를 의미한다. 모두 자기자신에 대해서 자화상으로 남겼다. 아름다운 자신의 몸과 정신을 모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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