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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토마토칼럼)'버닝썬'을 대하는 경찰의 자세

2019-02-21 06:00

조회수 : 8,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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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아직도 멀었는데, 때 아닌 ‘불타는 태양’으로 온 나라 안이 후끈하다. ‘버닝썬’ 이야기다. 잘사는 집 도련님이 모처럼 즐기러 왔다가 클럽 직원들과 싸움이 붙었다는, 매우 상투적인 사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버닝썬 사건’의 아가리는 예상 밖으로 컸다. 도련님은 왜 클럽 직원들에게 끌려 나갔는지, CCTV가 버젓이 있었는데 직원들은 어떻게 그렇게 당당한 활극을 찍었는지, 경찰은 왜 떼로 몰려와 그를 데려갔는지, 경찰서에서 도련님 어머니는 왜 그런 대접을 받았는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새발의 피가 됐다. GHB, 이른바 ‘물뽕’이 등장하면서다.
 
색도 맛도 냄새도 없다. 액상이나 가루로 소량만 사용해도 되기 때문에 술에 타 남에게 먹이기에 딱 좋다. 사람을 순식간에 혼절시키고, 깨어난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는 ‘환상의 마약’. 짧게는 6시간부터 아무리 길게 잡아도 24시간만 지나면 체내에서 산화 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악마의 선물’.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이 물뽕을 ‘데이트강간 약물(date rape drug)’이라고 한다. 지니고만 있어도 강간의 고의가 심히 의심된다는 의미다.
 
가장 깊이 취재한 보도를 보면, 버닝썬의 이른바 'MD'들은 주점이 시작되는 오후 10시쯤이면 VIP 고객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물뽕에 취해 정신 잃고 쓰러진 여성들의 나신이 찍힌 사진이다. MD들은 이 사진과 함께 ‘형님 작업해 놨습니다. 얼른 오세요’라는 문자메시지도 보냈다. 실제로 이 메시지를 받은 VIP들 증언에 따르면, MD들은 멀쩡한 상태의 여성들 사진을 미리 찍은 다음 ‘한명을 지목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버닝썬 직원들 말에 따르면, VIP들이 하루에 주대로 쓴 돈은 적게는 2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까지다. 그런 VIP들이 특정 여성을 찍으면 MD들은 물뽕 탄 양주를 간택당한 그들에게 들이댔을 것이다. 그렇다. 버닝썬은 인간 사냥터였다. 
 
듣자하니 MD라는 이름은 영어 ‘merchandiser’의 약자라고 한다. 우리말로 '상품기획자'라는 뜻이니 버닝썬 MD들이 다룬 상품들은 물뽕으로 잠재운 여성들인 것인가, 이들을 미끼로 불러들인 VIP들인 것인가. 치가 떨리고 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충격적이다. MD는 고상하게 자기들끼리 붙인 이름이겠지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 MD는 무슨, 그냥 생양아치다.
 
마약보다 극적인 포인트는 경찰과 버닝썬의 유착 의혹이다. 사건 초기 경찰은 과잉 진압 의혹 제기에 대해 단호하게 “적법한 절차였다”고 항변했다. 사건을 폭로한 김상교씨가 공개한 사건 당시 CCTV를 가만히 보면 일응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김씨 저항도 매우 거칠었다. 
 
그러나 과잉진압을 사이에 둔 '의혹과 방어의 균형'은 "몇십억씩 돈버는 클럽에서 마약을 상식적으로 유통하겠나"라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장의 한마디로 무너졌다. 뒤늦게 "상식적인 선에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고, 서울청에서는 철저하게 모든 부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수사할 계획"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 전에 버닝썬 마약 유통 정황은 이미 경찰에 제보된 터였다.
 
경찰은 수사 초기 마약수사와 '경찰과 버닝썬'의 유착의혹을 투트랙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이 폭로된 뒤 2개월 가까이 지나고 있지만 '경찰과 버닝썬의 유착의혹'에 대한 조사 사항은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왜일까.
 
강남 클럽업계에서는 일부 경찰과 공무원이 업주들과 깊이 유착돼 있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파다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수사권 조정 등 현안을 앞 둔 경찰에게 지금은 매우 중요한 타이밍이다. 기어이 검찰까지 가서 망신당하는 일이 있기 전에 스스로 썩은 부위를 잘라내야 한다. 그래야 경찰이 산다.
 
최기철 사회부장(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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