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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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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신풍속도)일상화된 '더치페이'…"세상이 달라졌다"

대관업무 '개점휴업'…직장인들 '저녁 있는 삶' 화색

2016-10-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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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벤츠 여검사' 사건을 발단으로 공직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근절하자는 취지에서 추진된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마침내 지난달 28일 본 궤도에 올랐다. 김영란법은 2013년 8월 정부안으로 발의됐다. 이후 2015년 3월 법이 공포됐고, 올해 시행령 제정 작업을 거쳐 정부가 최종 의결하기까지 숱한 논란과 파장을 낳았다. 일부 언론 등을 중심으로 집단적 반발도 있었다. 법 적용 대상자 수만 400만명. 공직사회는 물론 언론, 기업, 식당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9월28일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영란법은 세상을 바꿔놨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관계'를 중시하는 우리사회의 의식구조도 변화시켰다. 김영란법 시행과 함께 달라진 세상을 들여다봤다.
 
[뉴스토마토 박진아기자] 천지개벽이다. 공직사회는 움츠러들었고, 기업은 몸을 낮췄다. 언론은 불편해했고, 식당가는 한산해졌다. 새로운 문화도 나타났다. 관가와 정치권, 언론 등은 익숙하지 않은 청렴 외투를 걸쳤고, 더치페이와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 등 김영란법 시행에 따른 신풍속도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주요 관가 및 기업 등의 주변 식당가다. 김영란법이 공직자 등 약 400만명을 대상으로 음식값을 3만원 이내로 제한하면서 넘치던 발길이 뚝 끊겼다. 이마저도 직무의 연관성이 있으면 제한된다. 고급 한정식과 일식집, 고깃집들은 울상이다. 서울 중구의 한 고급 한정식집은 "예약은커녕 빈 자리가 넘쳐난다"면서 "매상이 크게 줄어 인건비, 재료값 등도 안 나올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일식집도 "급하게 (김영란법)안심메뉴를 만들어 내놨지만, 3만원짜리 식사만 팔아서는 밑진다"면서 "세월호 때도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으로 국내 외식업 연간 매출이 4조1500억원 감소할 전망이며, 외식업계의 약 37%가 타격을 받는다.
 
각자도생도 치열해졌다. 외식업체들은 법 시행에 맞춰 가격을 낮추거나 기존 메뉴의 변경 등을 통해 영업 타격을 최소화하고 있다. 해초요리 전문점 '해우리'는 지난 7월 헌법재판소에서 김영란법 합헌 결정이 내려지자 1인 2만9000원 상당의 '해우리 저녁 특정식'을 내놨다. 불고기 프랜차이즈 '불고기브라더스'도 김영란법에 맞춰 메뉴판에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 만들기에 함께한다'는 문구와 함께 2인분에 5만9800원짜리 세트 메뉴를 선보였다. 다른 식당들도 '영란메뉴'·'김영란세트'·'안심메뉴' 등의 이름으로 1인 기준 3만원 이하 메뉴를 개발해 대응하고 있다. SK플래닛의 맛집 추천 앱 '시럽테이블'은 '김영란법킷리스트'라는 이름으로 3만원 이하 메뉴를 갖춘 식당 정보를 제공한다. 
 
공직자, 기업인, 언론인 등은 저녁 약속이 뚝 끊겼다. 미리 잡았던 약속마저 줄줄이 취소하는 분위기다. 가을 골프시즌임에도 주말 접대골프는 자취를 감췄다. 시범케이스에 걸릴까 한껏 몸을 낮췄다. 한 재계 관계자는 "골프는 불가, 저녁도 기피하게 됐다"며 "홍보와 대관 등 대외 창구가 막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란파라치보다 두려운 건 내부고발"이라며 악용 가능성을 거론한 뒤 "법을 위반하지 않았더라도 이름이 거론되고 소명해야 하는 자체가 부담"이라고 말했다. 세종청사 한 공무원도 "법 시행 이후 저녁 약속은 안 잡고 있다"면서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으로, 연말까지는 최대한 조심하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동시에 그간 해외 문화로만 치부했던 '더치페이(각자내기)'도 일상화됐다. 설령 모임이나 약속을 그대로 진행하더라도 법은 준수하겠다는 의지다. 은행권에서는 이미 모바일뱅킹에 더치페이 기능 등을 탑재해 각자 결제를 유도한다. NH농협은행의 모바일뱅킹서비스 '올원뱅크'는 밥을 먹은 사람 중 1명이 대표로 계산하면 다른 사람들이 올원뱅크 앱을 통해 자기 몫을 송금해 줄 수 있다. 출시 2개월 만에 이용건수 13만건, 이용금액 111억원을 돌파했다. IBK기업은행은 법인카드 전용 '각자내기카드'를 출시했다. 'IBK법인카드 앱'과의 연동을 통해 자동으로 앱에 사용내역이 저장되고 누구와 언제, 어디에서 먹었는지 등을 기록할 수도 있다. 추후 법 위반 다툼이 생길 경우에 대비해 증빙자료를 남기는 기능이다.
 
기업의 대관 업무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업무 특성상 대정부 상대로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담당 공무원들은 만남 자체를 부담스러워 한다. 대관팀이 연중 가장 바빠야 할 국정감사 기간, 국회에서 기업 대관 담당자들을 보는 일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다선 의원실 관계자는 "국회 16년차인데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재계 관계자는 "부처 공무원들을 포함해 국회 사무처 직원들마저 만남 자체에 손사래 치고 있어 전화나 이메일 등으로 연락하고, 직접 접촉하는 것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홍보 업무도 달라졌다. 기자들과의 식사는 물론 주차권 제공마저 조심스러워지면서 곳곳에서 혼선도 빚어졌다. 홍보 행사를 진행하더라도 법 준수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LG전자는 19일 경기도 평택 소재 LG디지털파크에서 프리미엄 스마트폰 신제품 'V20' 생산라인 프레스투어를 진행하지만, 과거와 달리 식사 등을 일체 제공하지 않는다.
 
김영란법이 선물 5만원·경조사비 10만원 이하로 제한하면서 결혼·장례식장의 풍경도 달라졌다. 넘쳐나던 경·조사용 화환은 모습을 감췄고, 승진이나 기타 축하용 꽃, 난 등도 보기 어려워졌다. 경·조사용 화환이 매출의 80%를 차지하는 국내 화훼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시장 규모도 지난해 1조2000억원 규모에서 올해 8000억원대로 내려앉을 전망이다. 화훼업계의 위기에 농림축산식품부는 산하기관, 기업 등과 함께 '1테이블 1플라워' 캠페인을 벌이며 지원에 나섰다. 
 
반면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저녁 있는 삶'이 생겼다. 저녁 약속이 확연히 줄어들면서 퇴근 후 개인 여가 시간이 늘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57%가 김영란법 시행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 이후 가족과 함께 있는 저녁 시간이 늘었다"면서 "젊은 직원들은 헬스장 정기 이용권을 끊거나 악기 등 취미를 배우려고 동호회에 가입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박진아 기자 toyouj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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