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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형

sean1202@etomato.com

산업1부장 이승형입니다
(토마토칼럼)윤석열의 '국민 보호'와 검찰의 기소편의주의

2021-03-12 06:00

조회수 : 7,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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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A씨는 오늘도 검사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다. 햇수로 벌써 4년째다. A씨는 직장 내 성희롱, 부당노동행위의 피해자다. 상사의 성추행 가해 사실을 회사에 알렸지만 사측은 법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분리조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직무와는 상관없는 자리로 인사 발령했다.
 
그는 그날의 충격으로 지금껏 공황장애와 불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휴직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청 조사 결과 가해자의 성희롱과 사측의 부당노동행위 혐의가 인정됐고, 사건은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겨졌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검찰은 3년 동안 아무런 처분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면 수사관으로부터 법리 검토중이라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공인된 국가기관이 기소의견으로 넘긴 사건임에도 검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담당 검사는 3번 바뀌었다. 새로운 검사가 올 때마다 A씨는 자신의 피해를 구제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것은 헛된 꿈일 뿐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저축했던 수 천 만원의 돈은 변호사를 수임하느라 다 써버렸다. 인생에 있어 결코 짧지 않은 3년이라는 시간도 속만 태우고 흘러갔다. 소중한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가 모두 송두리째 사라졌다. 그리고 믿음, 피해자라면 국가기관으로부터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도 사라졌다.
 
지금 A씨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렇게 5년의 공소시효가 만료되고,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종료되는 경우다. 실제로 검찰의 '직무 유기성 복지부동'에 따른 피해 사례를 숱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A씨는 오늘도 신경안정제와 수면유도제를 먹으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외톨이가 됐다.
 
검사가 갖는 기소독점권은 누군가의 생사여탈권과 같다. 그 권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뀐다. 실로 민생과 매우 밀접한 권력이다. 그런데 과연 검사들은 과연 이 권력을 공정하고 합리적인 잣대에 맞게 써 왔는가. 어떤 사건들은 압수수색부터 수사와 기소까지 전광석화처럼 이뤄진다. 반면 어떤 사건들은 몇 년을 묵히며 차일피일 미루다 공소시효 시점이 다 돼서야 무혐의 처분으로 종결된다.
 
최근 이른바 한명숙 전 총리 모해위증교사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수 개월간 수사기록을 파헤친 임은정 검사가 담당 검사들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대검찰청은 사건기록을 단 며칠 간 훑은 뒤 이들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기소편의주의에 기댄 제 식구 감싸기의 전형이다.
 
실제 검찰이 범죄혐의가 있는 검사를 재판에 넘긴 기소율은 0.1%대에 불과하다. 일반 사건의 기소율이 40%에 이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입맛에 맞으면 번개처럼 수사해서 기소하고, 아니다 싶으면 수사고 뭐고 뭉개며 기소권을 남용하는 것은 직무유기와 다를 바 없다.
 
지난 4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이 사회가 어렵게 쌓아올린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제가 지금까지 해 왔듯 앞으로도 제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보호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사퇴의 변을 남겼다. 구구절절 좋은 말이다.
 
그런데 범죄 혐의가 있는 검사들을 수사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자신이 말한 정의와 상식에 부합하는 것인지 윤 전 총장에게 묻고 싶다. 또 그 국민 보호의 대상에서 A씨처럼 고통 받는 피해자들은 제외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31%. 10명 중 7명은 검찰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법원, 경찰 등 사법기관 가운데 꼴찌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줄곧 꼴찌고, 그 신뢰도는 해마다 떨어졌다. 말로만 국민 보호를 외친 결과다. 주목 받는 정치 사건에서만큼만 민생 관련 사건에 임했다면 이런 불신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할 일만 제대로 했다면 A씨는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검찰이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지극히 단순하다. 피해자들을 제때, 제대로 구제하고, 가해자들은 그 죄에 합당한 벌을 주면 되는 것이다. 공수처만 생겼다고 검찰 개혁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망가진 기소편의주의를 손보지 않고서는 개혁은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이승형 산업부국장 sean120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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