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22화)옛 소련의 한 영광이여
입력 : 2020-02-24 08:00:00 수정 : 2020-02-28 15:55:14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스베따 씨가 직접 만든 요리를 자신의 야외식당에 내놓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마마 마을의 영락(榮落)
 
이제 스베따 씨와 관련된 마지막 이야기를 해 보자. 그녀가 사는 마마 마을은 이르쿠츠크 주의 북동쪽 맘스커-추이스키 지구(마마강과 추야강에서 따온 지명)의 행정 중심지다. 이 마을은 도시와 농촌의 중간 정도 인구를 가진 ‘도시형 정착촌’으로 분류된다. 참고로, 소련 시절 만들어진 정착촌의 유형은 노동자촌, 휴양촌, ‘다차’촌(‘다차’는 농가형의 소박한 작은 여름 별장)같이 세분화되기도 하는데, 마마 마을은 바로 노동자촌이다. 마마 마을과 맘스커-추이스키 지구는 백운모의 채굴과 가공이 이뤄지던 광산 지역이기 때문이다. 스베따 씨의 첫째 딸이 기자로 일하는 지역 신문의 이름도 이와 연관된 <맘스키 가르냑>(‘마마의 광산노동자’)이다.
 
“1991년 이후 공장이 망가뜨려지고 무너졌어요.” 스베따 씨가 직접 일했던 운모공장, 즉 ‘채광 및 가공 종합공장 맘슬류다’의 얘기다. 이 지역에서 운모가 처음 발견된 것은 17세기 말이지만 본격적인 운모 채굴은 소련 시절에 행해졌다. 맘슬류다(‘마마의 운모’)가 조성된 1950~70년대에 맘스커-추이스키 지구는 백운모의 채굴과 판상운모(sheet mica)로의 가공 산업으로 전성기를 보냈고 1985년까지 집중적인 채굴이 이어졌다. 
 
채굴·가공된 백운모 결정체는 소련의 군사산업단지의 요구에 부응해 항공·해상 경계선을 감시하는 레이다, 비행기, 선박, 잠수함, 우주선 로켓, 전자 장비를 위한 라디오용 진공관, 초강력 발전소의 발전기 등에 이용됐다. 자신들이 채굴하고 가공한 백운모가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과 조국의 방위산업을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은 맘슬류다의 광산과 공장노동자들, 마마 마을 주민들의 자랑이자 긍지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이 지역의 채광은 쇠퇴한다. 소비에트 연방 백운모 생산량의 80%를 담당했지만 방위산업이 무너지자 1990년대 초반부터 주요 소비자가 사라지고 이곳도 다른 지역들처럼 경제난에 허덕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전자산업 기술이 발전하고 천연운모가 합성운모로 대체되는 환경의 변화도 천연운모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켰다. 1994년 맘스커-추이스키 지구에서의 백운모 탐사와 시굴이 중단되었고 광산들도 차츰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일을 잃은 노동자들은 살길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고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남은 마을은 황폐해졌다. 맘슬류다는 결국 파산의 길을 걷게 된다. 2008년 파산 절차의 틀 안에서 맘슬류다의 유한책임회사가 만들어졌고 2010년에는 법원의 파산 결정이, 2012년에는 입찰이 진행되었다.
 
스베따 씨의 야외 식당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왼쪽부터 스베따, 베라, 꼴랴 씨. 사진/필자 제공
 
조국의 영광을 만드는 ‘자랑스러운 아가씨’
 
타이가 지역의 마마 마을은 마마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고 마마강은 비팀강과 합류한다. “비팀강이 노란 물결로 보글대고 / 마마강의 푸른 눈에 입 맞추는 곳 / 나는 매일 저녁 자랑스러운 아가씨를 만난다네 / 다만 여러 해 전이었지…” 맘스커-추이스까야 원정대에서 일했던 지질학자이자 현재 작곡가인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그로진이 직접 가사를 붙인 노래다. 그는 맘스커-추이스까야 통합탐사원정대 대장으로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 칭호를 받은 지질학자 미하일 까르뽀비치 그로진의 아들이기도 하다. 맘슬류다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자랑스러운 아가씨”도 자부심에 찼던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강과 마을 이름에 붙여진 ‘마마’는 ‘숲의 녹색 장소’라는 뜻을 가진 에벤키어에서 왔다고 한다. 에벤키족의 원 낱말은 발음이 조금 다르지만 러시아인들이 그들 식으로 발음해 붙인 것이다. 파란 미인 마마강과 강력한 비팀강이 만나는 곳을 방문하는 연인들에게는 항상 행복이 찾아온다는 전설도 있다. 초록빛 타이가와 파란 마마강가에 선 이 마을이, 비록 옛 영광은 잃어버렸을지라도, 아름다운 자연과 한 시대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소련 시절에 우리는 쉽게, 평안하게 살았어요. 당시엔 똑똑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돈이 없으면 못 들어가지요. 물론 외국인만큼 학비를 내는 건 아니지만… 외국인은 달러로 내잖아요. 우리는 루블로 내고요. 내 자식 네 명 중 한 명만 무료로 대학을 다녔고 세 명은 학비를 내고 다녔어요. 소련 시절에는 아파트를 국가가 무료로 주고 의료도 무료였죠. 땅도 무료로 줬고요.”
 
덕분에 스베따 씨도 북쪽에 상당한 크기의 땅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녀가 옛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를 열심히 사는 그녀는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푸틴이 들어서면서 질서를 잡기 시작”했고 “연금 재단이 강탈당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녀가 온 마마 마을은 육로로 접근할 수 없어 배나 비행기로 이동해야 한다.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스베따 씨는 내년에도 자신의 푸드트럭을 배에 실어 레나강을 따라 이곳으로 일하러 올 것이다. 
 
무사 여정의 기원, 다시 이르쿠츠크로
 
멀리 보이는 두 개의 바위가 샤먼 바위, 즉 부르한 곶이다. 사진/필자 제공
 
‘샤먼 바위’라 불리는 부르한(부르칸) 곶은 하늘 신(텡그리)들의 지상 궁전들 중 하나이고 아시아의 아홉 성지들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 위치한 샤먼 동굴은 샤먼들이 제물을 바치고 의식을 치루는 곳이었고 후에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부랴트 불교도들이 부처의 제단을 모신 곳이기도 했다. 또한, 몽골인들의 통치자인 게겐 부르한(부르칸)―그는 지하왕국을 다스리는 에를렌 한(칸)과 형제이다―이 살았던 곳이고 칭기즈 칸이 머물렀다는 전설도 있다.
 
알혼 섬은 접경 지역인 몽골을 연상시킨다. 사진/필자 제공
 
샤먼 바위와 이곳저곳에 스며있는 갖가지 전설들, 믿음들을 뒤로 하고 다시 이르쿠츠크행 버스에 오른 내게 그 전설들보다 더 인상적인 광경이 잠시 펼쳐졌다. 돌아가는 버스의 운전기사는 러시아인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버스를 세우고 혼자 급히 내리더니 돌무더기 제단에 동전을 올리고 무사 운전을 기원하는 게 아닌가! 그가 종교를 갖고 있다면 십중팔구 러시아 정교일 텐데, 알혼 섬에서 보는 많은 러시아인들처럼 그 역시 부랴트족의 풍습과 샤머니즘 문화에 마음을 열어둔 모습이다. 
 
투어 차량의 창밖으로 바이칼 국립공원의 숲을 달리는 부랴트인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상황을 깨닫자 따라 내리고 싶었지만 버스 문이 닫혀 있는데다가 나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면 다른 승객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그 광경이 어쩌면 내가 알혼 섬에서―이런저런 명소를 둘러볼 때가 아니라―가장 자연스럽게 일상 속 샤머니즘 문화를 느낀 순간이었을 것이다. 알혼 섬이 지나치게 관광화된 탓인지, 혹은 단지 나의 주관적인 인상 탓인지, 몽골의 길 없는 벌판에서 만나던 자연스러운 샤머니즘의 흔적들이 이곳에서는 느껴지지 않아 내내 아쉬웠던 차였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샤먼 바위가 보이는 언덕 위에 하늘의 신과 땅의 인간을 연결하는 13개의 세르게(서낭당 기둥)가 서 있다. 기둥 윗쪽에 홈을 파서 셋으로 나뉜 부분은 각각 천상계, 지상계, 지하계를 상징한다. 사진/필자 제공
 
돌무더기 제단은 몽골의 ‘어워’, 우리나라의 서낭당처럼 부랴트인들이 정령을 모신 곳이다. 돌무더기 속에 세워진 나무대나 신목(神木)에는 색색 천이 매달려 있다. 몽골인과 같은 계통인 부랴트인들도 돌을 얹고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면서 기원을 한다. 우리가 산소에서 술을 올리고 땅에 뿌리듯이, 몽골인들도 술과 가축의 젖을 뿌린다. 오래전 인도에서 만난 한 티벳 부인과 버스로 동행할 때, 그녀는 차창 밖으로 빵을 조금씩 떼어 던지며 ‘고수레’를 했다. 하늘과 땅의 신들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의 새들과 함께 나눠 먹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이칼의 '작은 바다' 위 오고이 섬에서 만난 샤머니즘 문화는 특별히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2005년에 세워진 스투파(불교 탑) 수부르가가 있다. 사진/필자 제공
 
마침내 이르쿠츠크에 다다랐다. 나는 거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도시마다 거의 어김없이 들르는 ‘영원의 불꽃’을 찾아간다. 혹여 이곳에도 고려인들의 이름이 전사자 명단에 있을까 해서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그런데 ‘영원의 불꽃’이 있는 광장에서 보도블록을 새로 까는 작업을 하는 중인 노동자들이 보인다. 동양인들이다. ‘동남아에서 왔나?’, ‘베트남? 캄보디아?’ 문득, 나나이족 마을 시카치알랸을 방문할 때 첫날 택시를 운전했던 로만 씨의 말이 떠올랐다. 하바롭스크의 건설업과 관련해 예전에는 베트남에서 노동자들이 왔고 이후에는 남북한에서 왔다고 그가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검게 탄 얼굴의 노동자들을 보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그들이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르쿠츠크 시의 '영원의 불꽃'.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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