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17화)26년만의 재회, 이르쿠츠크
입력 : 2020-01-13 00:00:00 수정 : 2020-01-13 15:26:16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르쿠츠크 역에도 어김 없이 비가 오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이르쿠츠크에서의 소회
 
슬류쟌카에서 교외선으로 세 시간 남짓 걸려 마침내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갈랴 씨와 손자 게라, 짧았던 또 한 번의 인연과 작별한다. 역사(驛舍) 밖으로 나가기 위해 지하 통로를 지나가는데 천장 한 부분에 비가 새서 플라스틱 양동이를 받쳐 둔 모습이 눈에 띈다. 문득 이르쿠츠크 시의 경제 상황이 궁금해졌다. 1993년 새해 벽두, 소복하게 쌓인 흰 눈 속에서 처음 만난 이르쿠츠크는 눈 덮인 예쁜 나무집들과 한산한 거리,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동화 같은 기억으로 남았었다. 약 26년 7개월 만에 다시 만난 이르쿠츠크는 빗속에서도 여전히 동화처럼 아름답지만, 나는 어느덧 도시별 경제 현실을 비교하고 있다. 20대에서 50대로 바뀐 나이 때문인가, 러시아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 30년의 결과가 궁금해서인가?
 
이르쿠츠크 기차역 지하 통로 천장에서 새는 빗물을 받기 위해 플라스틱 양동이가 두 개 놓여 있다. 사진/필자 제공
 
다음날 아침 나는 슬류쟌카에서 만났던 폴란드 연구자 아쉬까 씨가 말한 베르쉬나 마을에 갈 요량으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이르쿠츠크 시에서 북쪽으로 약 135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쉬나는 러시아 제국의 총리(1906~1914년 재임)였던 스톨리핀의 농업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마을이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전 폴란드 왕국의 이민자들이 1910년 부랴트인들의 지역에 형성했는데 20세기 초의 폴란드 관습과 문화, 방언을 간직한 ‘시베리아 속의 폴란드’로 간주되고 있다.
 
“표가 없어요!” 매표소 창구의 직원이 거칠게 대답했다. 내일은 표가 있겠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모른다고 대꾸한다. 버스가 운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타이가 숲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에 버스 운행이 중단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매표소 직원의 대응 방식과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하림, 시현 씨의 경험에 의하면, 그들이 발트 3국에 가기 위해 모스크바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표를 살 때 영어를 사용하는 직원이 친절하게 도와주었고 매표소에서의 불친절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경우마다 다르고 개인 경험에 따라 다르니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사실 1990년대에도 러시아어로 말할 때보다 영어로 말할 때 대우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영어로 말하던 소수의 러시아인들은―특히 서비스직일 경우―러시아어보다 영어를 쓰는 외국인에게 더 친절한 편이어서 어떤 한국인 유학생은 호텔에 가면 일부러 영어만 쓴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영어를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외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공적인 관계에서 똑같이 불친절하게 대했기 때문에 오히려 평등했던 셈이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이르쿠츠크의 집들. 사진/필자 제공
 
시베리아의 옛 풍경, 딸쯰건축민속박물관
 
베르쉬나 마을에 가지 못하게 되자 대신 이르쿠츠크 남쪽에 위치한 딸쯰건축민속박물관을 방문하기로 한다. 한쪽에는 자작나무 숲이 우거지고 다른 쪽에는 안가라 강변에 맞닿아 있는 이 야외박물관은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의 과거를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바이칼 지역의 원주민인 토팔라르족, 에벤키족, 부랴트족과 17세기~20세기 초 러시아의 네 구역으로 구성되어 시베리아에서 살았던 그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자작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토팔라르족의 원추형 캠프. 사진/필자 제공
 
토팔라르족과 에벤키족의 원추형 캠프, 에벤키족의 매장(埋葬)문화와 식품저장고, 지붕에 잔디가 덮인 부랴트족의 목조 유르트 등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러시아의 시베리아 역사를 보여주는 안가라-일림 구역이다. 안가라강과 그 지류인 일림강 사이의 지역을 뜻하는데, 일림스크 요새의 망루인 탑과 교회, 이르쿠츠크 주 여러 지역의 마을들과 그 안의 관청, 교구 학교, 농장들이 보인다.
 
에벤키족의 원추형 캠프 근처에 동물들의 뼈와 그 위에 놓인 동전들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일림스크 요새 도시 건설의 역사는 특히 흥미롭다. 1630년 여름, ‘아타만’(수령) 갈킨이 이끄는 28명의 카자크가 안가라강을 따라 배를 타고 왔다. 안가라강과 일림강의 합류점에서 겨울을 맞은 그들은 이곳을 월동장소로 정하고 1631년 첫 요새를 짓게 된다. 1647년 요새에 도시의 지위가 부여됐지만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요새는 1666년 다시 지어졌고, 그것이 또 불에 타 1667년 정부의 명령에 따라 1.5킬로미터 떨어진 초원에 세 번째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이 스빠스까야(구세주)통행탑(1667년)이다. 이전 당시 파괴된 상태였던 카잔대문교회(공식적으로는 1679년 설립 추정, 1667년이라는 설도 존재)도 그 옆에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일림스크 요새의 스빠스까야(구세주)통행탑. 사진/필자 제공
 
사실 이 박물관은 1966년 우스찌-일림스크 수력발전소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일림스크 요새의 문화·역사적 유산이 침수 위기에 놓이자 이를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970년부터 준비되어온 박물관은 1980년에 문을 열었다. 러시아 제국의 용병이었던 카자크족에 의해 건설된 역사 공간을 보는 느낌은 뭔가 복합적이다.
 
일림스크 요새의 스빠스까야(구세주)통행탑 안에서 관람객들을 위해 카자크 복장을 한 사람들이 민요를 불러주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교구 학교 이야기
 
박물관에 재현된 공간들 중 19세기 말 이르쿠츠크 주의 우스찌-일림스크 지구, 케울 마을에 있었던 교구 학교도 포함되어 있다. 그곳을 혼자 둘러보는데 중국계로 보이는(중국, 홍콩, 대만 중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체관광객들에게 러시아인 안내자가 영어로 하는 설명이 귀에 들어온다. “원래는 정교회의 사제가 마을 학교의 교사였지만, 마을이 확장되면서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도시로 가 몰락한 귀족의 신사숙녀들을 교사로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온 가정교사들 덕에 교육을 잘 받았던 이 귀족들은 가난해졌지만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교사가 되어 마을에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교 안에 방을 두고 살면서 높은 봉급과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농민들은 러시아 서부의 농민들처럼 농노가 아니었고 자유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낚시와 사냥도 하고 수공예품도 만들어 팔았다. 물론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를 폐지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아직 잔존해 있었던 터였다. 막간을 이용해 슬쩍 던진 나의 질문에 가이드가 친절히 대답해 준다. “알렉산드르 3세(2세의 아들) 또는 ‘평화창조자’ 알렉산드르가 1884년 6월 13일 교구 학교 구성에 대한 명령서에 서명했어요. 하지만 학교는 1885년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돈으로 설립한 것입니다.” 그의 통치 당시 전쟁이 없어서 ‘평화창조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르 3세는 반동정치를 펼친 전제군주였고 그의 시절에 사실상 교육의 자유는 축소되었다.
 
박물관의 교구 학교 안에 전시된 교실 모습. 교사와 학생들의 인형이 보이고 벽 중앙에는 알렉산드르 3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진/필자 제공
 
그룹에게 가이드가 설명한 더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여자교사들은 3년간 결혼을 못한다는 계약서를 썼어요. 자녀가 생기면 학교 일에 헌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교사는 주 6일 일하고 일요일에는 학부모를 위한 학교가 열렸기 때문에 결국 일주일 내내 일해야 했다. 그녀가 덧붙인다. “여자교사들은 3년 후 그녀를 도와줄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었고 생계가 해결되기도 했지만, 남자교사들의 상황은 달랐어요. 그들은 보통 기간을 연장했는데, 3년·6년·9년 이런 식으로 계약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이건 참, 듣기가 착잡한 이야기지만 어찌하랴, 19세기 말이었으니. 가이드의 설명대로, 교육 잘 받은 그러나 돈은 없는 귀족들이 시골에 와 농민들의 자녀를 가르친 이유가 그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란 것, 그 와중에 여성은 결혼에 제약 받고 동시에 생계수단 해결책으로 삼기도 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 그지없지만 당시의 현실이었음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당시의 교실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교구 학교 안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문을 닫을 때까지 박물관을 둘러보던 나는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의 표를 예약하려 했지만 카드상의 문제로 실패했다. 당황스럽게도 버스는 카드 예약으로만 탈 수 있었기에 나는 러시아 관광객 버스에 다가가 현금 승차를 부탁해보았다. 그 차의 승객인 러시아 관광객들이 동의해도 운전기사는 요지부동이다. 모두들 떠나고 사람들이 거의 안 보인다. 불빛을 보고 달려간 내게 기념품점의 직원이 히치하이크를 권유한다. ‘히치하이크라고? 운에 맡기기엔 위험한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숫기도 예전 같지 않아 손이 안 올라간다. ‘이를 어쩌나…’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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