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3화)정자와 정자나무 밑 사람들
“거기 가면 / 이 세상 혼자가 아니지”
입력 : 2018-10-08 08:00:00 수정 : 2018-10-08 08:00:00
시골에 가면 마을 어귀에서 아직도 때때로 만날 수 있는 정감어린 존재들이 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으로 대표되는 장승, 그리고 그 장승의 옆에 혹은 마을이 잘 보이는 그 어드메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솟대이다. 나무로 된 장대나 돌기둥 위에 역시 나무로 또는 돌로 만든 새가 하늘로 날아오를 듯 앉아 있는 모습이 신비롭다. 장승은 마을에 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솟대 위의 오리는 마을의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승도 하늘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솟대도 마을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면, 정자와 정자나무는 마을사람들에게 휴식과 소통을 제공한 곳이었다.
 
윤태홍 사진 작가의 남원 서천리 당산 석장승. 사진/뉴시스·국립광주박물관
 
마을의 야외사랑방, 정자나무
 
시골에는 마을마다 묵직한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쯤 서 있다. 당산나무와 정자나무를 종종 겸하는 이 나무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버팀목이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추억 속 고향의 상징이며, 마을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는 ‘아!’하는 감탄과 더불어 다리를 쉬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아름드리나무가 당산나무의 역할을 할 때면 마을사람들이 지내는 제사도 받아주고 풍년과 건강을 기원하는 소망도 받아준다. 정자나무일 때는 정자 대신, 때로는 정자 옆에서, 낮에 일하다가 잠시 쉬러 온 사람들, 집안의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에게 널찍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저녁 먹고 마실 나온 사람들에게는 사랑방이 되어 준다. 아이들에게는 물론 ‘나무타기’ 놀이를 위해 몸을 기꺼이 내어주고 그네를 만들어 묶느라 가지를 잡아당겨도 아픔을 꾹 참고 서 있다.
 
천년 마을에는
천년 묵은 나무 없어도
백년 묵은 나무가 있다
< … >

미제 가면
김재홍 면장네 집 앞 정자나무
수리조합사무소 앞 물푸레나무
그 정자나무 밑
아침나절은 아이들 차지
낮에는 할아버지들 차지
밤에는 아버지들 차지 아저씨들 차지

거기 가면
이 세상 혼자가 아니지
이 세상 혼자일 수 없어
혼자 시루떡 먹고 간 배 부끄럽지

< … >
(‘정자나무’, 5권)
 
정자나무 아래는 마을공동체의 소통공간이고 휴식공간이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된 이 마을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의 세월을 지켜보아왔고 마을사람들은 그 나무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소나무, 은행나무, 팽나무도 있지만 아무래도 정자나무의 으뜸은 느티나무이다. 정을 나누고(때로는 험담이나 소문도 나누지만) ‘함께 사는 삶’의 상징물처럼 인식되어 온 정자나무에도,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당산나무에도, 주로 느티나무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늘이 깊고 넉넉한 느티나무는 전국 곳곳에서 정자나무로 또 당산나무로 제 역할을 해 왔고 사람들은 이 소중한 나무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정자나무, 당산나무의 새싹은 한 해의 농사를 예측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도시의 개발과정에서 많이 잘려나갔으나 도시에도 정자나무는 있다. 단지 잘 모르거나 외면되고 버려져 있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그래서 한 곳에서는 ‘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정자나무를 살릴 뿐만 아니라 정자나무가 상징하는 마을공동체 ‘문화’의 복원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2018년 8월 제주도 자치정부는 비자림로의 도로확장공사를 위해 삼나무 300여 그루를 과감히(!) 베어버리는 행정력으로 많은 국민들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대전 서구 괴곡동에서 열리는 '느티나무 목신제'. 괴곡동 느티나무는 수령이 700년, 수고 16m, 근원둘레가 9.2m에 이르며 오랫동안 마을의 수호목(守護木)으로 여겨져 왔다. 천연기념물 제545호로 지정돼있다. 사진/뉴시스·대전 서구청
 
공동체의 정자, 모정(茅亭)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지어진 양반들의 정자는 현대인들의 여행 목록에 오를 만큼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어우러진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지만, 마을사람들 모두를 위해 지어진 모정은 사전에 정의된 대로 “짚이나 새[볏과 식물] 따위로 지붕을 인 정자”, 소박하기 그지없는 정자이다. 모정의 다른 이름이 농정(農亭), 농청(農廳)이라는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정자는 경관을 중시한 양반들의 정자와는 달리 논이 있고 밭이 있는 일상의 공간에 지어져 그곳에서 농부들이 농사일을 의논하거나 쉴 수가 있었다. 또한, 모정이 없으면 정자나무가 이를 대신하지만, 모정이 있으면 그곳이 곧 작은 공회당 내지 마을회관인 셈이어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휴식·담소뿐 아니라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요즘에는 마을회관이 주민들의 회합장소이자 어르신들의 교류공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짚 대신 기와를 얹은 모정이 들어서서 노인정 또는 야외 회합장소의 역할을 해낸다. 낮잠도 자고 이웃집 사정도 시시콜콜히 얘기하고 농사정보도 나누고 수박도 나눠 먹고 장기를 두거나 화투도 치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콩을 까거나 나물을 함께 다듬는다. 모정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정자나무가 마을사람들의 온갖 이야기들을 들어왔듯이, 벽 대신 바람이 솔솔 통과하는 모정의 기둥에는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고 지붕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과교동 구계마을 촌노들이 동네 들판 한가운데 있는 정자나무 아래 모정에 모여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사진/뉴시스
양반들의 정자
 
앞서 언급했듯이, 양반들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었다. 그 용도도, 때로는 홀로 고즈넉이 사색이나 명상을 즐기고 때로는 지기지우들끼리 모여 학문이나 정치를 논하는 장소로 쓰였지만, 보다 종종 멋진 풍광을 감상하면서 시를 지어 낭송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여흥의 공간이기도 했다. 영·호남 서원이 많은 지역에 정자도 많이 발달해 선비들의 학문과 예술문화를 반영하기도 했지만, 한명회의 압구정처럼―‘압구정((狎鷗亭)’이라는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기심(機心)을 버리고 갈매기와 벗을 삼기는커녕―호화로운 잔치를 벌이는 공간이 되었던 정자도 있다. 그런가하면, 서자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가지 못한 설움을 달래기 위해 모였던, 다음과 같은 정자도 있다.
 
광해군 그 시절
강원도 소양강가에 정자 짓고
그 정자 이름은 윤리 따위 없노라고
무륜이라 지어
시와 술로 낭자히
세월을 희롱하는 일곱 사람
술 떨어지면 심지어 도둑질도 해가며
밥이 떨어지면 도둑질도 해가며
박순의 첩을 어머니로 삼은 박응서
목사 서익의 첩을 어머니로 삼은 서양갑
심현*의 첩을 어머니로 삼은 심우영 [*‘심전’의 오기 - 필자]
병사 이제신의 첩을 어머니로 삼은 이경준
상산군 박충간의 첩을 어머니로 삼은 박치의
그리고 김평손 박치인 일곱 사람
처음에는 그들이 모여
서얼도 벼슬하게 해달라 상소도 하였으나
어디 될 말이기나 한가
그 뒤 그들의 풍월은 도둑질로 지탱하다가
마침내 문경 새재에까지 출몰하여
은 꾸러미 장사치 때려죽인 것이 드러나
일망타진되고 마는데
그때가 하수상한 때인지라
그냥 녹림처사의 짓으로 몰지 않고
권신 이이첨이
박응서를 을러대어
광해군 폐하고 임해군*을 세우는 거사였다 조작하니 [‘영창대군’의 오기 – 필자]
이로써 이이첨은 그의 정적 모조리
이 일곱 사람 풍월도둑과 함께 싹 쓸어없앴다
< … >
(‘서자 강변 칠우’, 4권)
 
선비정신의 계승을 재조명하기 위해 선비촌을 복원한 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 옆의 정자. 사진/뉴시스
 
시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박응서의 부친 박순은 영의정을, 심우영의 부친 심전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모두 고관의 서자들인 이들 일곱 명은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조차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정자에 모여 시와 술로 풀었다.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해 ‘강변칠우(江邊七友)’를 자처한 이들의 정자 이름은 무륜(無倫), 그들의 절망감이 묻어난다. 
 
이들은 광해군 즉위 초기 서자도 관리에 등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연명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광해군 자신도 서자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인 선조는 서자 출신에 게다가 방계 혈통이었으나 조선사회의 뿌리 깊은 서얼차별정책이 이를 허용할 리 없었다. 강변칠우의 억울한 심정이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들이 불평등에 항거한 방식이 정자에 모여 음주와 풍월을 읊는 데서 도적질로 나아갔다는 것은―단순히 반발심에서 나온 치기어린 행동이나 유흥 자금을 위한 악행으로만 치부하기에는―의아한 일이다. 역사의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없으니, 그들이 사실 거사를 도모했고 그 자금 마련을 위해 여주 일대에서 상인들의 재물을 탈취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1612년(광해군 4년) 새재(조령)에서 은을 취급하는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사건으로 인해 결국 이듬해 계축옥사(1613년)의 희생물이 된 데에는, 이 사건을 영창대군 옹립 역모로 활용해 정적을 제거한 대북파의 역할이 컸다고 하겠다.
 
각설하고, 양반들이 고유명사 이름까지 붙여가며 풍류를 즐기던 호화로운 정자든 수양을 하던 고즈넉한 정자든, 이름 없는 평민들이 논일을 하다가 땀을 식히고 담소를 나누던 이름 없는 정자, 보통명사의 모정이든, 정자와 정자나무는 우리의 일상 풍경 한 곳을 차지해 온 존재들이었다. 오늘날 도시의 아파트 단지나 동네 공원에도 노인정이나 일종의 신형 ‘모정’이 있어 주로 노인들의 쉼터 역할을 하지만, 원래의 모정이 가졌던 공동체 문화의 생동감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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