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계절에 지금은 봄의 전령사인 개나리가, 진달래가, 벚꽃이, 조팝나무 꽃이, 서로 앞 다투어 피는 계절. 아, 그러나, 봄꽃들이 고립되었다. 사람들도 고립되었다. 꽃과 사람, 제각각의 고립으로 꽃과 사람과의 거리두기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꽃에서 흘러나온 향기가 영원불멸의 손님인 사람을 불러들이지 못하는 슬픈 형국이다. 경쟁을 다투던 세상의 공장들이 잠시 생산을 멈추어 미세먼지도 조금은 없어진 봄날. 시간은 그저 속절없다.    ‘코로나 19’로 명명된 전염병의 창궐로 사람들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개화의 시기에 고유의 꽃향기를 맡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면, 꽃들도 사람의 향기를 맡지 못한 쓸쓸함이 클 것이다. 해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꽃들의 잔치에 올해는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꽃의 외로움은 상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상처는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다. 꽃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주고받았던 인간적 향기가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2020년의 봄날은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 격리’, ‘마스크 꼭 쓰기’ 등, 전염병을 이기고자 하는 우리들의 사투가 지배하고 있다. 매스컴을 달구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사망자 숫자가, 날마다 장송곡처럼 흘러나온다. 비통하다. 하지만, 어찌하랴. 생존 앞에서는 인내가 가장 슬기로운 대처법의 하나인 것을.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하자. 불행하게도 이 사악한 바이러스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불행한 창조물이다, 거기에 더하여, 지구촌을 덮치고 있는 바이러스를 이제는 무소불위의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당분간, 아니 앞으로도 인간 세상에 이보다 더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핵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다. 전염병이, 바이러스가, 우리를 가장 참혹하게 사라지게 할 것이라는 견해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이 귀하고 아름다운 봄날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 비록 지금은 사회로의 통로가 일시 중단된 느낌이고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현실이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만남이 제한받는 시절이지만, 우리는 그런 시공간에서 호흡하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계획이 필요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이 전염병의 창궐이 무사히 끝나가기를 바라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지금,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있다면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평소 시간 없다고 미루어 두었던 책이나 읽지 못했던 좋은 글에서 찾고 있다. 덕분에 묵혀 두었던 문장들과 지식들로 내 마음에는 또 다른 싹이 트고 있다. 꽃이 핀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존재하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하고 있다. 이런 행위가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도 같이 해볼 것을 권한다. 현실적으로는 폐쇄된 공간에 우리가 고립된 듯한 느낌이지만, 이런 폐쇄, 이런 고립이 그래도 다행이라고 애써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사람 만나는 시간도 줄고 모임도 줄었지만, 오래전에 살았던 선인들의 세계관이나 현재를 살아가는 현자들의 훌륭한 언어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들의 지적 생산물이 내 가슴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물론 내게 새로운 상상이 찾아오기도 하고, 타인의 영혼 속으로 찾아가는 설렘도 있다. 나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시간과 함께, 나를 둘러싼 이웃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다. 앞으로 어떻게 이타적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지도 확대된다. 그래서 제안한다. 이 시절을 견뎌내는 일기도 써보고, 사랑하는 사람, 평소 미안했던 사람에게 편지도 써보자. 손 편지면 더 좋겠다.   꽃도 사람도 고립의 계절이다. 어쩌면 지금의 이 고립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벌칙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 읽기를 통해 내가 평소 알지 못했고 느껴보지 못한 세상을 읽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웃과 더불어 상생의 삶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그것은 슬픈 고립이 아니다. 벌칙도 아니다. 아름다운 고립이다. 행복한 규칙의 실천이고 미학의 실천이다. 지금의 고립을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를 튼튼하게 내장하고 축적하는 계기로 삼자. 지금은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문장이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계절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 일본어과 교수   


서울 서초동 '깔딱고개'법조팀 현장 기자가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을 한바퀴 도는 데 꼭 45분 정도가 걸린다. 맨 동쪽에 있는 서울법원종합청사 기자실부터 서쪽으로 서울중앙지검 기자실, 대검찰청 기자실, 대법원 기자실 까지 한번 훑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축복받은 DNA 덕에 '롱다리'를 가진 기자들은 시간이 더 단축될 수 있겠으나, 필자의 '장롱 다리'로는 허위허위 가도 그렇다.  이렇게 도는 길에는 두번의 육체적 고비가 있다. 서울교대 방향에서 서울법원종합청사 동문으로 올라가는 '제1 깔딱고개'와 서울중앙지검 정문에서 대검 정문을 통과해 대검 기자실로 올라가는 '제2 깔딱고개'다. 필자 혼자 붙인 이름이다. 둘 다 높아보이지는 않는데, 오르다 보면 진을 뺀다. 신기한 것은 역방향으로 돌라치면 길이 좀 순해지거나 시간이 줄어들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서울법원종합청사가 서울중앙지검 청사보다 지대가 조금이지만 더 높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서울중앙지검 기자실이 서울고검 기자실로 옮겨졌고 그때나 지금이나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막내 기자들(이른바 말진)은 팀장들이 있는 대법원 기자실 보다는 공보관실에 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대동소이 할 것이다. 신생 언론사 초년병 시절, 기자 생활이 하도 고되 재미 삼아 재 본 결과다.  당시에는 출입 기자단 개념이 뚜렷하지 않아 성실한 언론사 기자들은 누구나 기자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공기조차 까칠하고 찬바람 '쌩' 도는 기자실에 신생 언론사 기자가 편히 엉덩이를 붙일 곳은 없었다. 살갑게 대해 주는 선·후배 기자들도 분명 있었지만, 스스로 지레 주눅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45분 릴레이'를 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 시절 '깔딱고개' 보다 더 부담이었던 것은 판·검사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점심시간에 취재원과 기자가 만나면 세꼬시 한접시에 소주 각 1병이 관행이었고, 저녁에는 으레 폭탄주가 돌았다. 그만큼 법조기자들과 판, 검사들(가끔은 변호사들)의 만남은 주위에 흔했다.  여기에서 부담이 간다는 말은 '음주' 얘기가 아니다. 신생 언론사의 초년병이었던 필자는 그런 기회 자체가 없었는데, 거기에서 오는 소외감과 불안감이 부담이었다. 그들 모임을 먼저 알고 자리에 합석해도 누가 눈치를 주거나 끌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게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두터운 벽이었다.  물론, 그들 사이로 미친척 하고 계속 머리를 들이밀어 지금은 나름대로의 검증과정을 통과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지금도 분명 그들만의 '이너써클'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법원이건 검찰이건 똑같다. MBC의 '채널A 검언유착 의혹' 보도로 언론과 검찰은 지금 벼랑 끝에 섰다. 총선을 불과 일주일 여 앞 둔 상황에서 이 논란이 계속될지, 사그라질지는 알 수 없으나 국민이 이 둘을 같은 개혁 대상으로 정조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원죄가 있지만,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번에는 검찰도 적잖이 억울하다는 눈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이번 의혹의 유일한 물증을 가진 채널A는 해당 녹음파일을 서둘러 공개해야 한다. 검찰도 선별적으로 만든 언론과의 이너써클을 이번에는 기필코 끊어야 한다. 시대는 이미 변했고, 두 조직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최기철 법조데스크